벌써 『지식의 고고학』을 다 읽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에세이! 다들 열심히 작성하고 계신가요? 상쾌한 마무리를 위해 조금 더 힘을 내봅시다~
언표, 담론, 문서고, 그리고 고고학. 300여 페이지에 걸쳐 푸코는 이 낯설고 어렵고 독창적인 개념들을 설명했습니다. 때로는 학자적인 엄밀함으로, 때로는 날카롭고 맹렬한 비판과 더불어. 그럼 이제 우리는 말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성사도 아니고 구조주의도 아닌, 과학은 아니지만 과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언어학이나 논리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해진 것의 차원에 접근하는 이 ‘고고학’이란 도대체 뭘까요? 결론적으로 푸코는 왜 이렇게 어려운 방법론을 축조해야 했던 걸까요?
“문제는 이 역사를 어떤 목적론도 미리 환원시킬 수 없는 불연속성 속에서 분석하는 것, 어떤 필연적인 지평도 가둘 수 없을 분산 속에서 지표화하는 것, 어떤 초험적 구성도 주체의 형식을 부과할 수 없을 익명성 속에서 전개되도록 하는 것, 어떤 새벽으로의 회귀도 허락하지 않을 시간성으로 개현시키는 것이다. 즉 모든 초험적 자아도취로부터 그것을 떼어내는 것이다. 그것을 그것이 잃어버린 그리고 되찾은 시원의 원환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푸코,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279쪽)
의외로(?) 친절한 푸코씨. A.S 혹은 ‘자주 묻는 질문’과도 같은 결론을 써주셨는데요. 여기서 우리는 고고학의 핵심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건 바로 고고학이 ‘초험성’과 싸우고자 한다는 점이었지요. 푸코는 “사유의 역사를 그의 초험적 예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푸코, 279쪽)이 ‘지식의 고고학’의 궁극적인 과제라고 말합니다. 목적론, 필연적 지평, 초험적 구성, 시원으로의 회귀와 싸우는 것. 그러니까 말하자면 ‘말해진 것’을 다른 무엇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 자체의 고유한 자리, 그 환원불가능한 특이성 속에서 포착하고자 합니다. “문서를 기념비로 만들기”라는 슬로건을 통해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 그렇지만 여전히 어렵습니다. 푸코의 절친이었던 폴 벤느의 설명을 들어보죠.
“대부분의 철학은 철학자 혹은 사람들과 존재, 세계, 신이 맺는 관계로부터 출발한다. 푸코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당연한 듯 행하는 것, 진리라고 여기면서 말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니, 엄청난 다수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다양한 시대에 행할 수 있었고, 말할 수 있었던 모든 것에서 출발한다. 한마디로, 그는 역사에서 출발한다.”(폴 벤느, 『푸코, 사유와 인간』, 산책자, 28쪽)
벤느는 푸코를 ‘명목론(유명론)자’로 규정합니다. 이는 실재론과 대립하는 관점으로서 말해진 것이 어떤 고정불변의 실재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요. 푸코가 명목론자라는 것은 그가 ‘보편적인’ 대상들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상이한 시공간에서 성에 대해 말한 것들의 배후에는 ‘성(性)’이라는 보편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거지요. 고대인들이 ‘쾌락’에 대해 말한 것과 중세 기독교인들이 ‘육체’에 대해 생각한 것, 근대인들이 ‘섹슈얼리티’라고 부르는 것은 각각 환원불가능한 차이, 보편화할 수 없는 특이성들을 내포한다는 말입니다. 보편적인 것에서 출발하면 이런 차이들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차이들을 그저 부차적인 것이라거나 무지의 소산이라거나 문화적 차이라는 식으로 희석시키고 무화시키게 되지요.
한편으로 푸코는 ‘물 자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역사적이고 담론적이고 인간적인 사실들이지 실재 그 자체는 아닙니다. 분명 광기나 성 같은 ‘실재’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담론의 그물망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경험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해석이기 때문에 시원이나 본질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광기나 성이 헛된 관념일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어떤 쪼개지지 않는 본질을 품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 구체적이고 특이한 실재성 너머에 변함없는 실체나 본질이 자리잡고 있는 건 아니죠. 그래서 대상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대상의 형성과 담론의 형성은 동시적으로 이뤄집니다.
다른 한편으로 푸코는 주체를 의심합니다. 담론은 희박합니다. 벤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어진 시대에 주어진 영역에서 생각되고 보이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듬성듬성하다rare’. 그것은 무한한 공허 한가운데 떠 있는, 형체 없는 섬이다.”(폴 벤느, 91쪽) 비유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평소에 의식하지 않은 채로 호흡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우리가 조건과 환경에 제약받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고산지대에만 가도 우리는 우리가 특정한 산소농도라는 조건 속에서만 공기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마찬가지로 우리는 특정한 조건들 규칙성들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이 의식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한다고 느낍니다. 그럴 때만 우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생각과 말의 주인이라고 믿게 되죠. 우리는 담론의 배후에서 (때로는 실수하고 오해받기도 하지만) 담론을 수단 삼아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는 ‘주체’, ‘정신’, ‘의도’ 같은 것을 보고자 합니다. 물론 주체와 정신과 의도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담론적 현상으로부터 우리가 주체와 정신과 의도만을 보려고 할 때 우리는 말해진 것 자체의 특이성을 놓치게 됩니다.
푸코는 주체로부터 왕좌를 빼앗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 어떤 관념이나 언표에 대해서도 책임자를 자처하거나 특허권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관념도 우리의 의식을 독점적인 기원으로 갖지 않습니다. 말해진 것들은 그 나름의 계열과 조건과 규칙성 속에서 작동합니다. 그 과정에서 주체의 자발성이나 독창성, 개별성 같은 것이 완전히 무시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외부적인 규범을 명령받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언제나 자발적이고 개별적입니다. 그러나 그 자발성과 개별성이 본질적인 건 아니죠. 우리의 인식행위와 언표행위는 그것이 충분히 자발적일 때조차도 “규칙들을 포함하는 몸짓”(푸코, 288쪽)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개별 인간들의 정신은 신의 사유 속성의 한 양태라고 했던 스피노자의 말이 이해될 듯 합니다.
“차이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 그들을 대상으로서 구성하고, 그들을 분석하고, 그들의 개념들을 정의해야 한다. (…) 그것은 계속해서 분화들을 조직한다.”(푸코,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283쪽)
그렇다면 고고학은 뭘 하려는 거냐? ‘담론적 형성의 장’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쇄신된 언어학이나 역사학, 인간과학을 기술하려는 게 그 목적일까요? 물론 아니겠죠. 푸코는 고고학이란 곧 진단학이라고 말합니다. 특이성들에 주목하는 것, 담론들의 익명적 집합을 분석하는 것은 역사를 보다 효과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중요한 것은 푸코에게 담론이란 곧 담론적 실천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고고학적 관점은 이미 그러한 점을 함축하고 있지요. 담론은 사건이자 실천, 특이성입니다. 그렇다면 고고학적 분석은 역사나 실재에 대한 보다 참된 설명이라는 식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겠죠.
고고학적 담론-실천은 무엇을 생산해낼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푸코는 고고학이라고 스스로 규정한 방법론이 특정한 대의에 봉사해야만 한다고 미리 한정짓지 않습니다. 고고학이 차이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분산들을 조직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뿐이죠. 고고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건 우리에게 달린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푸코는 엄밀한 기술을 통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근본적으로 질문할 수 있는 하나의 틈을 마련해준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