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후기가 조금 늦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채운샘 특강이 있었는데요. 강의 내용 중 기억에 남았던 것들을 좀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건으로서의 읽기
저는 내심 푸코를 ‘무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봐 푸코 선생, 까다롭게 굴지 말고 하려는 말이 뭔지 얼른 뱉어내시지’하고 푸코가 하려는 말이 뭔지를 계속 궁금해했죠. 그런데 그것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잡으려 할수록 빠져나가는 것 같았죠. 어쩌면 애초에 푸코 자신조차 어떤 완결된 이해나 판단 속에서 책을 쓰기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채운샘께서는 “한 권의 책이란 자기가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에 어떤 계기로 책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책이 어떤 내용이나 의미나 저자의 의도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물건이고 도구라는 점을 새삼 의식하게 되었거든요. 누군가의 말이나 생각을 오래 보관하고 쉽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 철학이든 문학이든, 가벼운 독서이건 치열한 글쓰기이건 우선은 이 별난 도구를 사용하는 다양한 방식의 하나라는 것. 철학자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이 이 책-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은 좀 유별납니다. 푸코 같은 철학자는 더더욱 그렇죠. 푸코는 글쓰기를 기술(記述)이 아니라 그 자체 시도이자 실험으로, 또 읽기를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푸코 같은 이상한 사람이 만든 책은 아주 어렵게 읽어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선 푸코의 서술에 의존하여 그 끝에서 만나게 될 결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읽으며 푸코가 제기하고 있는 질문을 포착해내야 합니다. 말하자면 행간을 읽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행간을 읽고자 한다면 역시 자기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푸코가 제기하는 질문을 찾아내고 또 그 질문과 공명할 수 있는 자기 질문을 발견해내는 것. 정말 어렵게 느껴지는데요. 이렇게 찐하게 읽는다면 분명 푸코 읽기는 하나의 사건이 될 것 같습니다.
『말과 사물』을 이미 거의 다 읽은 마당에 이처럼 ‘읽기’의 어려운 모델을 제시해도 반성만 하게 될 뿐이지요. 그렇지만 『말과 사물』 읽기가 반드시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순간, 그 시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십시다(^^). 계속해서 높은 강도로 텍스트와 만나기를 시도하다보면 『말과 사물』이 언젠가 다시 소환되고, 새롭게 이해될 수도 있으니까요. 읽기를 사건으로 규정하고 보니, 읽기란 수많은 읽기를 함축하고 있고 또 새로운 읽기를 향해 열려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책도 수많은 읽기의 집적일 테니, 정말로 책을 읽는다는 건 사건이군요.
“말과 사물”
저는 좀 의외였는데요. 생각보다 ‘말과 사물’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궁금해 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았습니다. 채운샘은 다소 선문답 같은(?) 답변을 해주셨는데요. 어쨌든 저는 말과 사물 혹은 사물들의 질서라는 제목에도 많은 고민과 질문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채운샘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말은 사물인가 아닌가? 말은 물질인가 비물질인가? 말은 분명 소리값을 갖습니다. 발화자의 의도가 무엇이고 단어나 문장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무시하고 보자면 일단 말은 소리인 것입니다. 푸코의 제목은 ‘말과 사물’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말 또한 사물입니다. 물질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채운샘은 동양에서 물(物)이라고 할 때는 연장적인 성질을 갖는 물체들뿐만 아니라 사건 같은 것도 포함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일어나는 것. 작동하는 것. 행위, 표정, 언어 등등이 모두 ‘물’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죠.
‘말과 사물’이라는 제목과 ‘사물들의 질서’라는 제목 사이에서 푸코가 고민했던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어와 사물은 겹쳐질 듯 겹쳐지지 않는 아슬아슬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아요. 언어는 사물과 본질상 완전히 구별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어가 사유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사물들을 질서 짓고 배치하는 도표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언어의 본질규정과 지위, 기능 같은 것들의 변화가 특정 시대 에피스테메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더라는 것을 푸코와 함께 우리는 확인했지요.
그렇지만 푸코가 보는 언어는 근대 언어학이 포착하고자 했던 어떤 내적인 깊이를 지닌 실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질서를 구현하는 것으로서의 언어는 그 질서와 더불어 매번 형태를 바꾸어왔기 때문이죠. 르네상스 시대에 언어는 특권적인 사물이었고, 고전주의 시대에는 그 존재를 상실하고 재현의 기능을 떠맡게 되지만 또 그러한 이유로 사물과 분리불가능한 관계를 맺었죠. 근대에 이르면 언어가 역사와 내적 규칙성을 지닌 실체로서 출현하게 됩니다.
앞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책을 사용하는 방법, 따라서 문자나 언어와 주체가 맺는 관계 또한 역사적으로 계속 변형되어왔습니다. 채운샘께서는 근대에 이르러서야 묵독이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셨죠. 그 이전에 ‘읽기’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텍스트를 자기 입에 붙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책, 문자, 언어, 지식 같은 것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경험되었겠지요. 그리고 이는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에서의 어떤 환원불가능한 차이 또한 보여주는 듯합니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
다음으로 『말과 사물』의 하이라이트인 ‘인간’입니다. 채운샘은 푸코가 ‘우리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가령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자면 우리는 생각의 생각을 거듭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를 나이게 해주고 다른 것과 구별해주는 어떤 환원불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건 느낌일까, 생각일까, 기억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이 질문을 더 이상 던질 수 없는 데까지 밀어붙여야 비로소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어떤 궁극적인 전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푸코는 이러한 작업을 인간에 대해 시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전의 시대에도 인간은 존재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인간이란 무엇이고 하는 담론들은 유사이래 언제나 존재해왔죠. 푸코가 근대에 인간이 탄생했다고 할 때 그 말은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특별한 존재규정을 가지고 등장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근데 이건 정말 특별해보입니다. 근대 이전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인식의 중심부에 놓인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에 인간은 표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복잡한 개체로서 특권적 지위를 인정받았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인간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지식의 중심부에 진출할 가망은 없어보였습니다. 어쨌든 인간은 표 안에 다른 종들과 나란히 놓여 있었으니까요. 고전주의적 사유는 세계의 무한한 질서를 지식의 출발점이자 목적지로 삼았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서는 진지한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죠. 인간은 전체 자연의 질서 안에 속한 존재, 어쩌면 그 안에 접힌 담론의 주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근대는 분명히 인간에 대한 어떠어떠한 본질규정과 함께, 그리고 그를 향해 폭포처럼 쏟아지는 인식에의 의지와 함께 시작됩니다. 마치 ‘인간’이라는 게 어디에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식은 인간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우선 푸코는 ‘인간이 존재한다’라는 근대의 전제를 의문에 붙입니다. 근대적 앎과 윤리와 가치는 인간에 대한 전제와 관념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인간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요?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적 사고를 깨기. 인간이 이러저러한 것으로서 늘 있어왔다는 생각에 맞서기. 이것이 푸코가 르네상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를 가로질러가면서 시도하고자 했던 질문과 비판의 작업입니다.
책 내용을 채운샘이 다시 짚어주시니 좀 새롭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근대에서 이야기하는 노동, 언어, 생명(진화)에 대해서 말이죠. ‘노동’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개미나 고양이는 노동을 하나요? 분명 그들은 생존을 위한 활동을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노동’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활동에만 특권적으로 노동이라는 말을 쓰죠. 아마 이것은 가치의 창출이라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을 듯한데, 그렇다면 정말로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일까요?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이 소통을 하고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음을 알지만 그것을 ‘언어’라고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적인 소통만을 특권적으로 언어라고 부르지요.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규칙성과 역사성에 대한 고려 때문일 듯한데요. 무엇이 새삼 사람들로 하여금 언어의 ‘인간적인’ 역사에 주목하도록 했을까요?
어쨌든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인간이란 본질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러저러한 전제는 특정 시기에 만들어진 것일 따름인 것이죠.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어떻게 인간 존재를 다르게 펼칠 수 있을까?’입니다. 동시대적인 어떤 담론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힌트를 제공합니다. 채운샘은 생태학을 언급하셨는데요. 우리 시대에 생태학적 사유는 세상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노동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또 가령 도나 해러웨이 같은 사람은 인간 존재에 대한 확장적인 사고를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핸드폰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할 때 우리는 핸드폰을 우리의 뇌와 접속된 우리 신체의 일부라고 해야 한다는 거죠. 여기에는 인간에 대한 본질규정이 자리할 여지가 없습니다. 네트워크로서의 존재. 어쨌든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가 이미 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 속에서 무엇을 더 질문해보아야 할까요? 에세이에서 풀어봅시다!
생각한다는 것
푸코가 제기하는 표면적인 문제의식은 인간에 관한 것이지만, 채운샘께서는 푸코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풀어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성에 따라, 자연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을 타고난 존재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와 동일시하곤 하지만, 사실 우린 언어라는 질료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실어증 환자들의 예처럼, 말을 갖고 있지 않으면 생각 자체가 안 됩니다.
아주 기초적인 단계에서 우리는 언어를 사물과 짝짓기 시작합니다. 사과라는 소리를 듣고 빨갛고 단단한 열매를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반복적인 훈련과 시행착오가 이어집니다. 이미지를 분절된 언어로 붙들어 고정시키는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관념들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사과는 예쁘다거나 사과를 먹고 싶다거나 사과 같은 내 얼굴...(?) 아무튼 언어와 사물을 짝지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기증식하는 이러한 언어적 관념들을 가지고 세계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계를 우리의 머릿속에서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경험을 통해 생겨난 파편적 앎들, 관념들을 인과적으로 연결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우리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는 어떤 관념적 영역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생각이랍시고 하는 것은 상식의 반복, 자기 자신의 복제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생각’이라 하기 어렵지요.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의 테두리 밖에 있는 것과 조우할 때입니다. 바깥 혹은 타자. 그리고 한 마디로 생각할 수 없는 것. 인과율, 당위, 상식을 벗어나는 일(가령 사드의 ‘미덕의 불운’). 그런 점에서 푸코는 철학이 비-철학과 사유가 비-사유와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자신의 스승인 이폴리트의 추도식에서 이와 같은 말을 하기도 했죠). 데카르트에게 비-사유란 비이성이었습니다. 사유의 권리는 오로지 이성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고, 비-사유는 사유의 토대가 아니라 사유 바깥의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칸트에 이르면 비-사유가 사유의 조건으로 제시되기에 이릅니다. 푸코는 사드, 바타이유, 니체 같은 이들을 계승하여 칸트를 급진화시키고자 합니다. 사유는 사유 자신에 낯선 것에 의해 발생하고 작동하는 것. 푸코는 문학과 철학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 역시 끝까지 읽고 에세이를 쓰며 좀더 풀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후기는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9월 12일)은 추석 연휴로 방학이고요. 9월 19일에는 『말과 사물』 10장을 끝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과제 출력은 난희샘과 소현샘, 간식은 새벽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