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선험적-경험적 이중체가 되었다는 푸코의 말. 내내 알듯 말듯 어려웠는데요. 채운샘 설명을 듣고 좀 감이 잡혔습니다. 샘께서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가지고 설명해주셨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시녀들〉은 고정된 중심이 없는 그림입니다. 그림을 캔버스 너머로 확장하는 비어 있는 그 중심은 결정적으로 확정되지 않는 방식으로 다양한 존재들에 의해 점유됩니다. 그곳은 그림 속에 재현된 화가의 시선이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델의 자리일 수 있지만 화가의 캔버스가 뒤집어져 있는 관계로 우리는 사실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자리는 왕의 자리인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거울에 반사된 불확실한 이미지를 통해서만 왕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또 그곳은 관람객인 우리가 서 있을 자리이기도 합니다만, 〈시녀들〉을 그리고 있는 벨라스케스 자신, 즉 현실적인 화가의 자리이기도 하지요.
이처럼 〈시녀들〉의 구도는 단일하고 고정된 시선의 중심이 성립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이 이 중심을, 왕의 자리를 꿰차고 나면서부터입니다. 칸트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칸트는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을 인간의 인식주관 쪽에서 파악함으로써 인간을 인식의 중심에 위치시킵니다. 재현의 접힌 주름에 지나지 않았던 인간은 이제 세계(현상, 표상)를 출현시키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러저러한 것들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의 원인은 바로 나 자신이다! 칸트는 근대적 사유를 위한 공간을 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공간 안에서 인간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여건으로 기능합니다. 더 이상 초역사적인 도표가 지식의 실증성을 확증할 수 없을 때, 사물들이 제 나름의 역사성과 깊이, 내적 구조를 지니고 등장할 때 그것들에 실증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이제 인간입니다. 이에 따라 ‘부’와 그것의 유통 및 재현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이, 담론으로서의 언어와 그 단언하고 지시하는 역량이 아니라 상이한 문법적 구조를 지닌 여러 언어들과 그 배후에 존재하는 말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푸코는 칸트로부터 시작된 이 근대적 에피스테메의 풍경을 뒤집힌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푸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지식의 대상인 동시에 인식의 주체라는 모순적인 입장을 띠고 출연한다. 즉 인간은 왕에게 속하는 자리에서, 노예화된 군주, 주시 당하는 구경꾼으로 나타난다.”(429쪽)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왕의 자리를 꿰차게 되었습니다. 신의 섭리나 자연의 질서 같은 것을 참조하지 않고도 인간은 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하고 앎을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나의 욕구, 나의 몸, 발화 주체로서의 나. ‘나’를, 인식 주체로서의 인간을 출발점으로 온갖 지식의 실증성들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이는 왕이 되는 일임과 동시에 노예가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왕의 자리란 주체의 자리일 뿐만 아니라 대상의 자리이고 보는 자의 자리임과 동시에 보여지는 자의 자리였던 것처럼요.
“우리는 뇌의 해부학적 구조나 생산비의 메커니즘 또는 인도유럽어족의 동사변화 체계를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미셸 푸코, 『말과 사물』, 민음사, 451쪽)
인간은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선험적 조건은 인간의 인식주관이라는 점에서)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자 세계에 대한 일관되고 합리적인 앎을 정립하게 하는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은 또한 이러저러한 외부적 조건들에 의하여 구성된 존재이기도 합니다. 인식의 주체인 인간은 스스로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조건 하에서만 인식의 주체로 설 수 있었습니다.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아 경제와 생물과 언어를 사유할 수 있게 되었으나 동시에 인간은 뇌의 해부학적 구조나 생산비의 매커니즘, 인도유럽어족의 동사변화 체계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조건지어진,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역사성과 깊이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며, 뒤집어 말하자면 자신이 아닌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subject’라는 단어의 두 가지 의미처럼 인간은 주체이자 종속된 존재가 된 것이죠.
그래서 푸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요?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책을 읽는 동안 은연중에 느끼고 있던 것을 채운샘께서 짚어주셔서 좋았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근대’에 대한 푸코의 입장입니다. 채운샘께서는 푸코가 ‘근대는 모든 것의 원죄다’라는 식의 본질주의 혹은 유토피아주의와 거리를 둔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근대를 죄악시하지 않고, 기원으로의 후퇴가 기원의 회귀를 불러오는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근대성을 넘어설 것인가? 푸코는 이런 고민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쨌든 푸코의 ‘한 방’은 인간에 대한 논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약 200년 전에 지식의 배치 안에서 탄생했다는 것, 그러므로 인식의 조건이 달라짐에 따라서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지금 우리는 ‘인간’의 형상이 해변에 그린 그림처럼 사라져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알고리듬이 우리를 대신하여 판단해주고 스마트폰이 우리를 대신하여 기억해주는 시대. 그런데 오히려 모든 경험과 감각과 판단과 가치의 출발점에 ‘나’를 놓는 경향은 더 강화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는 어디에 와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에세이를 쓰며 좀더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드디어 『말과 사물』을 다 읽었습니다! 길다면 길었지만 또 매주 안 넘어가는 페이지와 이해 안 되는 문장들을 붙들고 씨름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네요. 1페이지도 잘 안 읽히는 책을 어떻게 500페이지나 읽었나 몰라요... 그런데 또 그렇게 오래 또 많이 읽었는데 어찌 이리도 머릿속에 남는 게 없는지... ㅎㅎ 자 다음주는 『말과 사물』을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푸코가 말하는 근대적 사유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은 나의 인식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에세이를 써 오시면 됩니다. 분량은 ‘최소’ a4 2페이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