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는 채운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불연속 개념에 대한 강의 내용을 나름대로 간략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식의 고고학』 서론과 2장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마주친 단어 중 하나는 바로 불연속일 것 같습니다. 푸코는 이제 불연속이 역사적 분석에 있어 3중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합니다. 불연속은 역사가의 숙고된 조작을 구성하고, 역사적 기술(記述)의 결과이며, 역사가의 작업이 끊임없이 특이화하고자 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과서적인 역사는 연속을 다룹니다. 기원, 유래, 전통, 영향. ‘역사’ 하면 떠오르는 이러한 용어들이 함축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연속성이지요.
고딩 시절 역사샘이 던진 질문이 떠오릅니다. ‘한국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누구는 정부수립 이후라고 하고, 누구는 광복, 누구는 또 그 이전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굉장히 헷갈렸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저는 ‘현재’를 있게 한 과거의 모든 사건들과 영향들이 역사라고 한다면 ‘한국사’를 쓰기 위해서는 역사 이전으로까지(어쩌면 지구가 탄생한 시점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소급해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볼 때 마치 과거를 현재에 이르기 위한 이전단계라는 식으로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건이나 계열도 ‘특이화’할 수가 없고, 단지 저 머나먼 시원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연속성 속의 한 지점에 종속될 뿐이라는 점도 있지요.
채운샘께서는 불연속의 사유란 모든 것을 그것이 존재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관계들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속성 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이 모든 시대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위에서 사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개념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역사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믿음.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 중세에도 고대에도 선사시대에도 존재했으리라는 믿음. 그리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과 인간의 생활양식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규범들을 그대로 소급 적용하려하는 것. 이것이 휴머니즘과 결합한 연속의 사유, 본질주의적이고 목적론적인 역사입니다.
그래서, 불연속을 사유한다는 것이 단순히 연속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불연속을 우선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바슐라르의 문턱 개념이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요. 바슐라르에 따르면 앎은 그것을 앎으로 만들어주는 어떠어떠한 문턱들과 더불어 존재합니다. 가령 뉴턴의 시대에 천문학과 점성술은 서로 인접한 학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천문학을 물리학이나 다른 학문들과 연관시키고 점성술로부터 분리시키는 새로운 문턱의 형성과 더불어 한쪽은 앎으로 다른 한쪽은 비-앎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지요. 우리가 인간과학의 맥락 속에서 앎이라고 여기는 것과 물리학의 차원에서 앎이라고 하는 것의 규준은 상이합니다. 총체적이고 객관적인 앎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앎을 앎으로 성립시키는 조건들(문턱들)이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불연속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처럼 어떠한 대상을 그 자명한 기원이나 고정된 본질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하여금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외부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지식의 고고학』 2장을 끝까지 읽고 과제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인원수대로 프린트해오시구요!). 간식은 청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그럼 이만!
오머나! 역시나 선량한 건화샘! 제 후기를 대신해 주셨네요. 감사감사해요. 일주일 내내 몸살 기운이 있어 이제 겨우 올리려고 들어왔는데 ㅎㅎ
바슐라르 선생은 수염이 참 ᆢ영화 피그가 생각나네요. 숲 속의 현자ᆢ현자들은 수염이 거창하더군요
톨스토이도 ㅎ ㅎ
쓸데없는 소리였습니ㅡㅏ
역사의 분석에 있어 불연속은 3중의 역할을 수행한다. 불연속은 역사가의 숙고된 조작을 구성하며, 역사가의 기술의 결과이며, 역사가의 작업이 끊임없이 특이화하고자 하는 개념이다...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