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월요일 『지식의 고고학』 수업은 채운 샘 강의로 대신했습니다. 강의 시작하기 앞서 각자 궁금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 질문하라고 하셨는데, 몇몇 샘들이 “불연속”에 대한 질문을 하셨어요. 채운 샘의 자세한 설명이 있었죠. 설명을 들으면서 저 역시 불연속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요. 말하자면 불연속을 “단절”이라고 할 때 은연중 역사적 단절로 인식하는 습관이 있었던 거에요. 여기에서 “단절”은 역사적 끊어짐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는 당연히 연속성 위에 있다, 연속적이지 않으면 불연속이 어떻게 있겠는가. 그러니까 불연속이란 시대마다 그 시대의 담론을 형성하는 앎의 배치가 있는데,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조건과 규칙들이 어떤 권력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배치되는가. 그 점을 보라는 거였죠.
이게 왜 중요한가. 동일한 사건이라도 이런 앎들의 배치에 의해 존재론적 지위가 달라지기에 그렇다. 그러면 왜 존재의 지위가 달라지는가. 시공간에 따라 인식에 차이가 있어서 그렇다는 거죠. 그러면 이 불연속을 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건의 문턱, 즉 불연속 지점을 사유해야 우리의 인식의 문턱을 사유하게 된다는 거죠. 우리는 보통 구석기 시대는 이랬고, 고대, 중세, 근대는 “이런 사회였어”라는 고정된 하나의 관념을 가지고 그 시대를 얘기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하나의 틀로 판단하고 심판하는 전체사적 개념이라는 거에요. 기존의 역사학이 기술한 방식이 이렇다는 거죠.
그러나 역사라는 건 어떤 특정한 인물들의 특정한 사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하고도 복잡한 변수들로 우글거리는 민중들의 일상이 있지요. 그런데 중심이 아닌 바깥의 것들은 배제하고, 그렇게 일괄적으로 단순하게 기술할 수 있는 문제인가.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근대에 이르러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총체화하는 방식이라는 거에요. 시공간에 따라 지각하는 게 다르고, 경험이 다른데 서양 관점의 역사 인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근대의 역사 개념이다. 그러니까 푸코가 역사를 사유하는 방식은 연속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 즉 역사는 뭔가 하나의 틀로 이어져 왔다고 하는 관념에 쐐기를 박는 거죠.
이를테면 어떤 사건들을 바라볼 때, 그것들은 어떤 연결 속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기에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 라는 식의 역사를 인과성으로 해석하는 관념. 우리는 그렇게 고정된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푸코가 보기에 거기에는 그런 식의 앎을 배치하는, 분할의 배치가 있다. 그 분할을 통해 바라보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인과로 해석하는 데에는 어떤 기준이 있기에 그렇다는 거죠. 그런 인과의 개념으로 역사를 인식하면 인과로 연결되지 않는 나머지는 다 버리는 것 아닌가. 기존의 역사는 그런 역사적 관점에 따라 시간성 속에서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점철된 일화를 배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역사에는 정치적 사건만 있는 게 아니잖은가. 그리고 특정한 사건만 중요한 것도 아닌데 어떤 사건 중심의 인과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라는 거죠.
그런 식으로 사건을 선별하고 구분하는 것에는 이미 가치평가를 하는 어떤 기준이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그 기준, 기준을 가르는 “문턱”은 무엇인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그 문턱 안에 작용하는 규칙들. 그것을 보고자 하는 게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거에요. 이렇듯 그 시대의 담론을 형성하는 지식의 구성을 보려면 도처에 존재하는 그 문턱들을 먼저 봐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앎이 주체적이지 않다”라는 차원을 떠나 『말과 사물』에서 19세기에 등장한 근대의 “인간”. 이 새로운 “인간”에 대해서 모든 인간의 앎과 모든 인간의 존재 방식이 이런 불연속적인 지점 위에 생겨난 것이로구나, 를 이해했다면, 『지식의 고고학』에서는 “앎”의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는 앎들. 즉 근대의 지식이 과학이 되기 위해 어떤 과학적 문턱을 넘고 있는지. 그 문턱의 기준은 뭔지. 뭘 기준으로 층을 나누고 있는지를 보라는 거에요. 다시 말해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는 그 문턱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앎이라는 건 그런 문턱을 넘어서 작동한다, 따라서 나의 합리적인 지식이라는 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이것을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랍니다. 그런 점에서 『지식의 고고학』은 『말과 사물』보다 더 나아갔다는 거죠.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포인트가 있지요? “어떤 지식이 지식 바깥과 관계 맺고 있는가” 왜냐하면 언제나 지식을 중심화하려는 힘들이 도처에 존재하는데, 이 힘들은 언제나 권력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힘들이다. 문턱은 그런 힘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면 푸코의 결론은 뭔가. 분산적이고 계속 변환하는 이 다양한 앎들과 삶의 양식들을 배제하는 앎. 즉 “우리가 진리야”라고 중심화하는 권위적인 앎을 봉기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푸코 공부를 하는 우리가 할 일은 뻐~언한 것 아니겠어요? 이런 권위적인 앎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의 앎을 구성해 나갈 것인가.
그러기 위해 또! 알아야 할 것은 (늘 용량 미달 상태인 이 머리로 알아두어야 할 게 너~무 많네요 ::;;;) 근대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 즉 이게 과학적 지식이야, 라고 규정하는 담론. 그러한 담론의 외부 조건과 내부의 조건을 규정하는 규칙들은 무엇인지. 어떤 규칙들 속에서 지식과 지식 아닌 것이 분할되는지. 이것을 꼭 정리해야 한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식의 고고학』을 이해하고 나면, 읽었지만 이미 까마득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담론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긴 하겠네요 ^^
『지식의 고고학』을 읽을 때 꼬옥 기억하셔야 할 것은 담론을 구성하는 내부의 규칙이 뭔지. 그걸 과학적 지식이라고 하는 외부의 힘은 뭔지! 즉 내적, 외적 규칙이 뭔가! 이 두 가지를 놓치지 말고 꼼꼼하게 노트 필기해두라는 샘의 주문이셨습니다. 이걸 통해 벙벙하지 않게 질문을 만들어보라고요.
제가 늦게 올려서 건화샘이 후기 대신한 줄 알고 오머나~~ 왠일로? 했었는데 아니라네요. 내가 몸 상태가 안 좋다 하니건화샘이 마음 내서 대신 써줬구나~ 하면서 감동 먹었는데 ㅎㅎㅎ
후기 감사합니다. 규정되고 배치되는 것의 규칙을 아는것, 어떤 규칙 속에서 지식이 분할되는가? 책상앞에 적어놓고 <지식의 고고학> 을 읽어야 겠어요.
오우~더욱 부드러워진 청샘의 후기, 잘 읽었습니다. 샘~세미나 시간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물론 저도요... 시대마다 담론을 형성하는 내적, 외적 규칙이 뭔가를 봐라 ! 잘 알겠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