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는 『지식의 고고학』 2장 ‘언설적 규칙성’을 끝까지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이 챕터에서 푸코는 매우 ‘일목요연하게’ 언설적 장의 형성을 설명했습니다. 말하자면 ‘문서를 기념비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의거해야 할 기본적인 규칙들을 기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코는 언표의 ‘존재’와 ‘출현의 규칙’을 밝혀내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말합니다. 말해진 것들은 그 고유의 존재, 두께, 표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나름의 익명적인 규칙성들 속에서 출현합니다. 푸코가 생각하기에 말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에 밀착되지도(대상은 언제나 복수적으로 존재하므로), 주체에 종속되지도(주체는 언설적 장의 한 기능으로서 분산되므로) 않습니다. 말해진 것들은 또한 형식적인 구조의 측면이나 구성법칙의 측면으로, 그러니까 문법적이거나 언어학적인 규칙들로 환원될 수 없는 역사적 출현의 조건을 지닙니다. 우리는 문법이 허용하는 모든 것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언설(담론)의 이러한 희박성은 언표행위를 규정하고 또 언표행위와 더불어 변형을 겪는 어떤 언설적 배치의 역사적 선험성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푸코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질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말하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발화의 주체이자 사유의 주체가 맞나? 분명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만 우리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규칙성들 속에서, 전제들과 범주들과 자명성들 속에서 말하고 생각합니다. 주체로서 우리 자신에게 부여된 지위나 상황에 따라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분할되기도 하고요. 저는 이런 생각과 함께 니체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본 적이 없다.―우리가 어느 날 우리 자신을 찾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너희의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 인식의 벌통이 있는 곳에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날개 달린 동물이자 정신의 벌꿀을 모으는 자로 항상 그 벌통을 찾아가는 중에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쓰는 것은 본래 한 가지―즉 무엇인가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 외의 생활, 이른바 ‘체험’에 관해서라면,―또한 우리 가운데 누가 그런 것을 살필 만큼 충분히 진지하겠는가? 아니면 그럴 시간이 충분한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러한 일에 우리가 한 번도 제대로 ‘몰두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히 의미를 지닌다.―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책세상, 337~338쪽)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입니다. 마치 벌집으로 꿀을 옮기는 꿀벌들처럼 우리는 열심히 무언가를 지각하고, 경험들을 해석하고, 기억들을 수집 및 재편집하죠. 그러나 새삼 정말로 놀라운 것은 우리가 대부분의 지각작용을 의식하거나 통제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 중 아주 일부분만을 의식 안에서 포착하죠. 푸코는 아마도 니체가 제기한 것과 비슷한 질문을 보다 실증적인 차원에서 제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푸코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분명 그는 주체의 분산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주체를 구조로 대체하자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푸코는 “형성의 체계들로서 기술되는 것은 언설의 최종적인 단계를 구성하지 않는다.”(114쪽)라고 말합니다. 언설적 형성은 주체나 구조 같은 고정불변하는 경직된 토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언설적 장을 분석한다는 것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단위나 범주, 전제 같은 것들을 되묻도록 하는, 즉 인식과 발화의 주체로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의 자리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지식의 고고학』 3장 1~2번을 읽고 세미나를 합니다. 간식은 후남샘께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