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노동, 생명, 언어 (1-3)
벌써 8월 1일입니다. 무더위도 깊어가듯 <말과 사물>도 이제 근대적 인식의 장으로 들어왔고 우리 세미나도 무르익어..갑니다.(?) 생소하고 낯설었던 르네상스시대의 닮음, 고전주의시대의 재현의 인식을 넘어 우리와 밀접한 인식체계라 볼 수 있는 ‘노동, 생명, 언어’를 읽고 토론했습니다. 사실 노동에 대한 기원도, 생명이라는 개념의 기원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생각해보면 참, 의아하기도 합니다. 노동 없이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당연히 전제하고 있고, 생명은 죽음과 대응되는 실체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있으니까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과정과 방법보다 이미 상정해놓은 진리값을 찾아가는 목적주의적 전도처럼 보이는 근대적 인식이 어떻게 19세기 인간학에 뿌리내리고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텍스트에 언급되는 여러 사실적 논증에 관한 시대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일이 찾는 것도 난감했고, 독해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매번 강조되었던 <말과 사물>을 통해 푸코가 말하고자 한 ‘지식의 가능조건이 어떻게, 어떤 경험과 실천으로 변화하여 우리의 인식체계를 구성하여 왔는가’를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훈샘이 ‘도대체 실증성이 무엇인가? 증명가능해서 근거화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첫 질문으로 정적을 깨뜨려주셨습니다. 르네상스시대는 닮음이, 고전주의시대는 재현하는 방식 그 자체가 앎의 체계가 되는 것이었다면, 변동하는 역사의 시대에는 증명가능한 것에 대한 정확한 근거가 요구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역사성과 실증성은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 같고요. 난희샘이 실증성을 요구하는 인식이 더 세계를 편협하게 보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대우주와 소우주, 마테시스와 탁시노미아적 질서로 세계를 이해해왔던 것과는 달리 보편과 객관이라는 실증성을 바탕으로 정말 촘촘한 근거로서 증명해야 진리 혹은 진실로 인정되는 것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여기서 니체가 비판했던 진리일반의 기원문제가 나오는 것이겠지요. 푸코가 9장에서 분석하는 인간학적 사유로 넘어가면 더 깊이 진전될 것이 기대됩니다.
- 노동가치설-리카도의 노동의 의미변화는 어떤 효과를 가져왔나
고전주의시대 인식론적 변화가 재현의 한계에 부딪치며 형성된 새로운 에피스테메는 ‘노동, 생명, 언어‘의 변화를 통해 증명됩니다. 고전주의시대 화폐의 유통이 부의 분석이었다면 아담스미스는 항구적 교환 가치척도로 ’노동‘을 말합니다. 이와 달리 리카도는 노동자의 체력, 노고, 시간이 포함된 물건의 가치를 낳는 활동을 구분했지요. 생산과 교환으로 분리되어 상품화된 노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분리할 수 없었던 일하는 힘‘을 인간의 신체활동에서 따로 떼어내 사고팔 수 있는 ’생산가능한 노동‘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생산으로서의 노동은 축적을 가능하게 했고, 그래서 생산의 조건(임금, 자본과 소득, 이윤 등)이 중요하게 되었으며 시간의 연속으로 표현되는 노동은 경제학의 존재방식과 관계맺습니다. 리카도의 경제학이 바라본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결핍‘상태였습니다. 인구증가로 자연으로만 먹고살 수 없는 시기의 역사에서 경제활동이 출현했다는 것,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두 가지의 실천으로 나타났습니다. 리카도의 비관론과 마르크스의 혁명론. 푸코는 두 방법 모두 인간학과 역사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는 방법일 뿐이라고 말합니다.(365) 자본주의적 방식과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커다란 근본적 차이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리카도와 마르크스 모두 유한성의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리카도는 안정상태를 느리게라도 유지하는 성장의 방식을, 마르크스는 생산과정에서의 소외와 착취의 계급대립에 혁명적 해결 방식을 주장하는데 이 또한 성장의 방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인간이었지만 미래의 인간인 니체는 변증법과 인간학이 뒤섞인 결핍에 대응하는 이러한 약속을 유토피아적 망상이라 보며 이를 해체하고자 합니다.
- 지배하는 것은 이제 존재의 가능성이 아니라 생명의 조건이다.(381)
이 문장의 전후를 둘러싸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라마르크와의 차이, 생명이 무엇인가? 사유의 역사를 가능하게 한 내적인 조건은? 등, 리카도가 경제학적 차원에서 노동을 일반적인 생산양식에 포함시킨 것처럼 퀴비에는 비교해부학을 통해 생물들이 분류에 앞서 유기적 구조에서 종속, 의존, 공존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생물 기관의 특징에 의한 자연사의 평면적 단일성이 흐트러지면서 ’호흡, 소화, 순환, 운동‘이라는 기능으로서의 구별이 앎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화석표본으로 즐비한 실험실에서 퀴비에가 마주친 공간의 불연속은 재현의 일반법칙을 벗어나고, 서양지식에 생명 자체의 고유한 역사성의 출현과 이에 대한 성찰의 시작이 된 놀라운 발견이었다는 사실!
퀴비에가 발견한 것은 지각할 수 없는, 순수하게 기능적 측면에서의 생명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현재 우리가 생명존중, 생명공학, 생명수.. 등으로 너무나 익숙하게 쓰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생명‘이라는 말은 고전주의에서는 실체화되지 않았던 말이었지요. 도표에 재현된 것은 형태, 수, 기질, 크기에 따른 유사성과 차이를 갖는 가시적 존재물이니까요. 푸코가 주목한 것은 퀴비에가 발견한 불연속지점, 즉 심층에서, 비가시적인 것에서, 깊이를 통해 생명은 그 자체의 생존조건으로 부여받은 역사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새로운 성찰입니다. 노동이 생산조건을 통해 역사성을 부여받듯이. 이전에는 지각조차 불가능했던 생명은 무기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의 부단한 전환, 삶과 죽음의 경계, 등등의 19세기 앎의 계열에서 ’모든 실재의 뿌리‘ 라는 근본적인 가치를 갖게 됩니다. 이 고갈되지 않는 생명의 힘에 의해 형성된 생물은 혹은 존재는 이제 한순간 흩어지고 사라지는 현상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게 되죠. 두둥~! 생명을 사유하게 되는 인간, 스스로를 역사적 주체로 인식하는 인간이 등장하였습니다.
여기서 푸코는 새로운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푸코는 근대 주체의 출현에서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일까요.
“
하나의 사유가 역사의 종언을 예견하는 바로 거기에서, 다른 사유는 생명의 무한을 선언하고, 하나의 사유가 노동에 의한 물건의 실제적인 생산을 인지하는 바로 거기에서, 다른 사유는 의식의 망상을 일소하며, 하나의 사유가 개체의 한계와 함께 개체의 삶에 요구되는 것을 긍정하는 곳에서 다른 사유는 개체의 삶에 요구되는 것을 죽음의 속삭임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 이와같은 대립은 19세기 이후로는 지식의 영역이 모든 지점에서 동질적이고 일률적인 성찰의 근거를 마련할 수 없다는 징후일까? 이제부터는 실증성의 각 형태에 적합한 ’철학‘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까?...”(388)
이 모순과 대립이 공존하는 관계에서 사유는 어떤 방향,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파편화된 지식, 분과학문으로 분리되어버린 인간과학의 한계, 유토피아로 향하는 몽상에 대한 비판이 구체적 경험과 실천에서 자기자신을 변형하고, 향유할 수 있는 방법론적 철학에 길을 열게 된 것일까요. 많은 논의가 되었습니다만 정리가 어렵습니다. 푸코가 던지는 문제를 잘 붙잡고 앞으로의 공부를 통해서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8월의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몸을 잘 돌보시고 다음 시간에 뵈어요~
세미나 하면서 혼란스러웠던 부분들을 잘 정리해주셔서 복습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