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참 전에 고인이 되신 양주동 박사의 면학(勉學)의 서(書)라는 수필에는 자신이 영어를 독학할 때 삼인칭 단수(三人稱單數)란 말의 뜻을 몰라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古諺)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항목만 자꾸 염독(念讀)하였지만 종시 의자현(義自見)이 되지 않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독서백편까지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제게는 『말과 사물』 독서가 도무지 의자현되지 않습니다. 푸코가 앞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지난 것을 상기시키며 나름 친절하게 설명하는데도 말입니다.
고백하건데 4장 말하기는 내용 이해가 어려워 과제도 걸렀는데 지금은 그 4장의 연장선에 있는 언어 부분에 대해 세미나의 후기를 작성해야 하니 과제를 거른 죄가 마치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와서 그 자리에 도로 꽂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늘 세미나에서 중요 부분을 짚으며 많은 내용을 확인하고 엊그제도 그랬는데 기억력이 꽝인 제가 세미나에서 오간 내용을 갈무리해 두지 않아 후기 작성은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작업이 되었습니다. 이럴 땐 어찌해야 하는 건지 정말 어디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8장 내용 전체를 아우르며 “4. 보프와 5. 대상이 된 언어” 부분을 간단히 정리하는 글로 후기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변명이 길었던 것과 함께 양해를 구합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사유는 18세기 말 무렵에 명백히 드러난 재현의 공간에서 종합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의해, 그리고 이 불가능성과 상관적이고 동시적이지만 곧장 대립하는 의무, 즉 주관성의 선험적 영역을 열고 역으로 대상을 넘어 우리에게 생명, 노동, 언어라는 ‘준(準)선험적인 것’을 구성할 의무에 의해 지배됩니다. 이로써 탁시노미아의 광범위한 수평적 전개가 바뀌어 탁시노미아는 막연한 수직성에 따라 정돈되기에 이릅니다. 푸코는 이 변화의 징후를 리카도, 퀴비에, 보프의 저서에서 포착해 냅니다
리카도 부분에서 푸코는 19세기 초에 지식의 새로운 배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핵심이라며 이 배치에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경제학상의 역사성(생산 양식과 관련하여)과 인생의 유한성(결핍 및 노동과 관련하여) 그리고 한없는 감속의 형태나 급진적인 반전의 형태를 띠는 역사의 종언이라고 말합니다.
퀴비에 부분에서는 구조들을 서로 의존하게 하는 내부의 관련성은 모든 상관관계의 토대 자체가 되어 동일자와 타자가 단 하나의 공간에 속할 뿐일 때에는 자연사가 있고, 이 평면적 단일성이 흐트러지기 시작하고 이 단일성보다 더 깊고 더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은 동일성을 배경으로 차이가 두드러질 때 생물학 같은 것이 가능해짐으로써 생존의 조건에 따른 생명 유지의 역사성이 발견된다는 점을 상기해 봅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역사성의 성립이겠지요?
이제부터는 우리가 세미나를 한 ‘보프 단원과 대상이 된 언어’를 짧게 정리하겠습니다.
퀴비에 단원 마지막을 언어의 과학에는 문화와 문화의 상대성 그리고 문화마다 독특한 표현 역량의 철학이 있다고 인정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끝을 맺은 푸코는 4. 보프 단원을 “모든 것을 해명해 줄 결정적인 사항은 언어의 내적 구조 또는 비교 문법인데 문법은 우리에게 언어들의 계보에 관한 전적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제공할 것이다.” 라는 말로 시작하며 앞으로의 전개에서 언어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펼쳐 보일 것을 시사합니다.
쥐시에와 라마르크, 뒤이어 퀴비에에게서 특징이 재현의 기능을 상실했듯 거의 동일한 시대에 언어의 영역에서 낱말도 유사한 변화를 겪게 되어 18c 말 낱말이 재현의 기능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나는 일종의 도약이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언어의 영역에서 재현적 낱말은 해체됩니다. 물론 낱말은 끊임없이 의미를 갖고 낱말을 사용하거나 이해하는 사람의 정신에 어떤 것을 재현할 수 있지만 말이 담론에 모습을 보이고 담론에서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말이 본래의 권리에 의해 고유한 것으로 보유하는 직접적인 담론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낱말의 형태 자체, 낱말을 구성하는 억양, 낱말이 문법상의 기능을 맡고 있으며 문법상의 기능에 따라 겪는 변화등 일정한 수의 엄밀한 법칙을 낱말이 따르기 때문이고, 그래서 낱말은 무엇보다 언어의 고유한 일관성을 결정하고 보장하는 문법 구조의 일부분인 범위 내에서만 재현과 결부됩니다.
그리하여 언어가 내부로부터 특징지어지고 다른 언어들과 구별되는 방식에 관련되는 내부 변이와 일반 문법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낱말과 음절의 변형을 검토하는 내부 분석을 겪게 되며 자음이나 모음의 변화에 관한 법칙이 규정됨으로써 새로운 어간의 이론이 확립되고 어족체계의 새로운 규정이 가능하게 되어 언어의 사변형의 선분 같은 것을 형성했던 명제, 분절, 지칭, 파생 등이 변화합니다.
고전주의적 질서에서 언어는 재현의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전개였기에 누구나 언어를 거침으로써만 세계의 사물을 인식할 수 있었지만 19세기부터 언어는 “온전히 닫힌 것”이 되고 고유한 밀도를 획득하며 고유한 역사와 법칙 그리고 객관성을 펼쳐 보여 생물, 부, 가치 그리고 사건 및 인간의 역사와 동일한 차원에서 언어는 인식의 대상이 됩니다.
언어를 순수한 대상의 지위로 귀착시키는 언어의 격하는 세 가지 방식으로 보완되는 데 그 첫째는 언어가 담론으로 표면화되고자 하는 모든 과학적 인식에 필요한 매개물이라는 사실이고 둘째는 언어의 연구에 부여된 결정적인 가치이며 마지막은 문학의 출현으로 푸코는 문학의 출현이 가장 중요하고 예기치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문학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언어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푸코는 그런 측면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문학이 관념을 재현하는 담론과 갈수록 더 구별되고 스스로 극단적인 독자성 속으로 틀어박혀 고전주의 시대에 문학을 유통시킨 모든 가치(취향, 즐거움, 자연스러움, 진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기 쪽으로의 영속적인 회귀를 향해 방향을 틀기만 할 뿐이라며 문학의 모든 맥락은 글을 쓰는 단순한 행위로 수렴되는데 여기서 언어는 억양도 대화자도 갖지 않고 자신 외에는 말할 것이 전혀 없어서 오로지 자기 광채로 반짝거리기만 할 뿐이라고 합니다.
요 며칠 마구 쏟아진 물 폭탄으로 온 사방이 재난입니다. 모두 무탈하시기를....
현정샘, 후기를 계기로 복습을 열심히 하셨군요~ 『말과 사물』도 백번 읽으면 의미가 드러날까요...
노동(경제)부분은 뭔가 더 현실적으로 와닿는 부분이 많고, 생명 부분은 그래도 비교적 따라가기 쉬운 것 같은데 언어가 유독 걸리네요. 그래도 이번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언어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지?'라는 물음은 던져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푸코의 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말이라거나 대화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언어'라고 하는 순간 어떤 내적인 규칙성을 지니고 있고 기원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실체를 떠올리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이 실제 우리의 언어생활을 온전히 이해하게 해주는 것은 아닌데도요. 아무튼 『말과 사물』은 처음 읽어서 장악할 수 있는 책이 결코 아닌 것 같아요. 일단 숙이고(?) 푸코 말을 열심히 따라가봐야겠죠...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