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말과 사물』 8장을 끝까지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꾸준히 읽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막바지입니다! 휴가에, 폭우에, 각자의 사정에 정신이 없으시겠지만 이제 하이라이트에 도달한 듯하니 좀더 힘내봅시다. 도대체 푸코가 근대적 앎의 배치를 어떻게 흔들어놓으려고 이렇게 공들여 빌드업을 해온 것인지, 정말 궁금하지 않습니까?? 푸코가 잘 설명을 해놓아도 제가 알아먹지 못할까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만, 또 머리를 맞대면 뭔가가 보이겠죠?
지난 시간에 읽은 부분은 언어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노동, 생명, 언어 중 마지막 언어에 관한 파트였지요. 고전주의 시대에 말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부의 분석이건 자연사건 어떤 지식이건 간에 말을 거쳐가야 하니까요. 지식이 도표의 공간을 이루려면 무엇보다도 언어가 재현으로서의 가치와 재현의 역량을 지니고 있어야 했던 것이죠. 말은 담론이고 담론은 인식이어야 합니다. 언어는 세계의 재현으로서의 사유를 재현하는 이중화된 재현, 투명한 거울, 재현의 힘을 담지하고 있는 지도와도 같은 것이었죠.
말하자면, 고전주의 시대에 언어는 존재와 재현의 공통장소이자 지식의 표면이었습니다. 지식이 언어를 통해 기술되고 전수된다기보다는 잘 다듬어진 언어 그 자체가 지식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보프와 슐레겔의 시대에 이르면 분명한 단절이 이뤄집니다. 바로 언어가 지식의 대상이 된 것이죠. 푸코는 이를 언어가 고유한 존재를 얻게 되었다거나, 언어가 무거워졌다고도 표현합니다. 언어는 그 내부로부터 특징지어지며 다른 언어들과 구분될 수 있게 되었고, 이와 더불어 언어의 내부 변이에 대한 연구가 가능해졌습니다. 언어는 재현되는 대상보다도 발화하는 주체(민족)에 의해서 더 많이 특징지어지게 되었고, 보편적 재현성이 아니라 그 나름의 내적인 역사를 지닌 어족 체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자, 언어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전에는 제기된 적 없던 문제들이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언어가 의심스러운 녀석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언어의 연구에 결정적인 가치가 부여됩니다. 가령 교육받은 문헌학자이자 아마추어 생리학자였던 니체(그러고보니 상당히 근대적인? 두 학문에 발을 걸치고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싶네요)는 문법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문제 삼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서양인이 신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은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성향 때문이 아니라, 서양인의 언어가 언어 규칙이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끊임없이 신을 일으켜 세우기 때문”(413쪽)입니다. 언어의 존재는 착취와 수탈을 은폐할지도 모르고, 무의식의 심오한 메커니즘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며, 우리의 ‘인간적인’ 편견을 강화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언어의 연구는 인도유럽어족이 어쩌고 우랄알타이어족이 저쩌고 하는 문헌학(어원학)의 전문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문제 삼는 한 언어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어떤 아이러니와 마주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난희샘이 이런 질문을 해주셨죠. 특정 문법 규칙과 어족 체계 안에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언어를 질료 삼아 특정 언어의 존재를 포착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말하자면 굴절어인 프랑스어의 존재를 교착어인 한국어를 통해 포착하고 기술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인간은 언어의 규칙성 안에서 소통하고 사유하는 존재이면서도 언어의 그 규칙성 자체를 포착해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푸코는 뭘 말하려는 걸까요? 정말이지 푸코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이 지점에서 또 일리치를 소환하게 되네요. 이번에 규문톡톡에 올라온 미영샘 글에는 언어에 대한 일리치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가 나오는데요. 미영샘 글 일부분을 살짝 훔쳐와보겠습니다. (전문은 여기에 올라와 있으니 읽어보시고 댓글도 남겨주세요!)
언어란 각자의 고유한 문화적 환경에서 생겨난 것이다. 냄새를 맡고, 만지고,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있는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익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일상의 대화를 통해, 싸움과 자장가, 소문, 이야기, 꿈을 듣는 가운데” 저절로 체득되는 삶 자체다. 일리치는 “말과 글이 살과 피의 덩어리에서 솟구쳐 나오며...... 감정과 의미의 숲에서 솟구쳐 나온다”(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느린걸음, 289쪽)라고 표현한다.
삶을 생존으로 대상화하고 선을 가치로 파편화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을 저주했던 일리치는 언어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삶 속에, 관계 속에 스며있는 것이고 살과 피의 덩어리에서 솟구쳐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과 사물』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니, 마치 일리치가 ‘언어가 정말로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라고 항의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소통이란 정보의 교환으로 환원할 수 없는, 맥락을 읽어내는 신체적이고 관계적인 활동이라고 했던 우치다 타츠루의 말도 떠오르고요. 아무튼 대상으로서의 언어를 포착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은 일리치가 말하는 ‘살과 피의 덩어리에서 솟구쳐 나오는’ 말과 글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네요. (무책임한 후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말과 사물』 9장 1~3번(~437쪽)을 읽고 과제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 과제 출력은 미현샘과 제가 하고요. 간식은 현정샘께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전혀 '무책임'하지 않은 후기인데요? 일리치는 말과 삶이 하나인 세계를, 버네큘러의 세계를 살아갔던 것 같네요. 미영샘의 글, 언어란 체험적인 우리네 삶의 장 속에서 익히는 것이라는 말이 깊이 와닿습니다. 그런데 애기들한테 아이패드를 쥐어주고 엄마는 딴 데 정신팔려있고 ᆢ하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