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푸코는 본격적으로 ‘인간’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벨라스케스 「시녀들」의 비어 있는 왕의 자리, 봄의 대상이자 주체인 그 자리에서 인간이 솟아오릅니다. 이제 인간은 도처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사태와 동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동일화와 대상화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까요? 가령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 결여에 직면하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대상화하며 다른 한편으로 경제의 영역에서 자기 자신의 경험적 욕망과 같은 욕망을 알아봄으로써 부의 영역을 인간화합니다. 인간이 인식의 대상으로서 출현하던 시기에 인간은 또한 지적 실증성의 토대로서 기능하기 시작합니다.
“생물의 일상적인 생존을 익명으로 갉아먹는 죽음은 바로 나의 경험적 삶이 내 자신에게 주어지는 바탕으로서의 근본적인 죽음과 동일한 것이고, 경제 과정의 중립성 속에서 사람들을 연결하고 갈라놓는 욕망은 내가 모든 사물을 탐하는 근원인 것과 동일한 욕망이며, 언어를 지탱하고 언어 안에 자리하고 급기야 언어를 닳게 하는 시간은 내가 나의 담론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나의 담론을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연속 속으로 끌어들이는 시간이다.”(미셸 푸코, 『말과 사물』, 민음사, 433쪽)
푸코는 근대적 사유가 시초부터 동일자에 대한 어떤 사유, 차이가 동일성과 같은 것인 사유를 향해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동일자에 대한 사유, 차이가 동일성과 같은 것인 사유. 무슨 말일까요? 아마도 인간화하는 사고 방식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담론의 힘’이 주요했지 인식의 주체로서 인간의 자리는 희미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소통작용 속에서 사물들의 연쇄를 도표화하는 것이 중요했죠. 인간은 재현에 생긴 주름이다! 라고 푸코는 멋지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어쨌든 고전주의적 지식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었고 인간 자체를 참조하지도 않았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인간은 재현의 작용에 속하는 한 기능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근대에 이르면 각 학문의 실증성의 배후에 인간의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정치경제학의 근저에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있고요, 생물학의 중심 어딘가에는 진화의 긴 계열의 한 극단으로서의 인간이 있습니다. 문헌학은 이제 담론을 다루지 않고 인간적인 것으로서의 언어의 역사를 다루죠. 노동하는 인간, 죽음을 마주한 인간, 말하는 인간. 인간, 인간, 인간! 이제 사람들은 경제를 생각할 때도, 자연을 관찰할 때도, 언어에 관해 질문할 때도 끊임없이 인간의 형상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란 누굴까요? 뜬금 없지만, 스피노자는 유한한 양태인 인간의 실존은 인간의 본질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 자체가 아니라 외부적인 조건들이 인간의 실존을 규정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실존은 외부적 조건에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 펼쳐질 수 있으며, 그러한 실존 속에서 인간의 본질 규정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무망하다는 말이죠.
인간이 지식의 대상으로 출현한다는 것은 어떤 동일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된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나’의 욕망을 ‘인간’의 욕망과 겹쳐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은 곧 경제의 원동력인 인간의 욕망과, 나의 죽음은 생물 일반의 죽음과 겹쳐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푸코가 말하는 동일자에 대한 사유가 아닐까 싶네요.
공지가 늦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다음 시간에는 『말과 사물』 9장 4~5번(~450쪽)을 읽고 과제를 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설샘, 과제출력은 경혜샘과 새벽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