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영역이 된 언어
‘말이 더 이상 재현과 교차하지 않고 사물의 인식을 위한 자율적인 격자를 제공하지 않게 되었을 때’(418쪽) 언어는 근대의 문턱에 진입하게 된다. 고전주의 시대에 인식이자 담론으로서 최후의 보루였던 언어가 재현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단일성이 복원될 수 없을 정도로 다수의 존재 방식에 따라 출현하게 된다. 근대 언어는 문헌학으로, 역사로, 해석으로, 문학으로 다양한 관점에서의 깊이와 밀도를 갖게 되었다. 생명, 노동과 달리 언어는 분산적인 형태로 존재했기에 철학적인 성찰로부터 동떨어져 있었다.
19세기 말에 언어는 사유의 영역이 된다. ‘누가 말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언어가 출현하게 된 조건을 문제화한 니체는 최초로 철학의 과제를 언어에 대한 성찰과 관련 지었다. 푸코는 ‘본질은 ~이다’라는 닮음이나 유사성을 통해 사물의 실재성이나 주석달기식 해석에서 벗어난 비판으로서의 해석이 새롭게 등장했다고 보았다. 니체에게 선과 악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선’이라고 말할 때, 우리에게는 이미 역사적으로 전제하는 ‘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걸 무시한 채 ‘선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우리 시대의 가치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해서 문헌학은 자기 가치를 입법하려는 실천 속에 있어야 의미가 있어지고, 철학 역시 문헌학의 역사적 관점 속에 있어야 의미가 있어진다. 이런 이유로 언어를 문제 삼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밀도와 깊이를 지닌 근대의 언어의 감수성은 사물의 실재성을 지녔던 16세기의 언어와는 분명 다르다. 16세기 언어가 가문의 문장처럼 재현을 하고 있지만 문장의 위엄 같은 사물로서 갖는 힘이 중요하다. 고전주의 언어가 ‘담론’이라는 것은 재현자체가 인식이기에 대상의 역사나 고유한 유기적 구조를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담론을 행하는 주체가 아니라 담론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 다양한 관점으로 존재하는 언어가 르네상스 시대는 신의 말씀 같은 말을 해석했고, 고전주의 시대는 해석하는 게 아니라 투명한 그 자체였다면 근대는 파편화되고 다양한 시선들을 담고 있는 말에 대해 또다시 해석하는 것이다. 이때 르네상스시대의 해석은 근원적인 텍스트가 드러날 때까지의 무한한 주석 작업이었다면 깊이를 지닌 근대의 언어에 대한 해석은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주체의 등장. 자기 자신의 재현, 18세기 이전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생명의 잠재력, 노동의 생산성, 또는 언어의 역사적 밀도도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은 지식의 조물주가 고작 200년 전에 손수 만들어 낸 아주 최근의 피조물이다. 자연과학은 인간을 종이나 속에 속한 것으로, 일반문법과 경제학은 필요, 욕망 또는 기억과 상상력과 같은 관념들로 인간을 표현했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한 의식은 없었다. 고전주의시대의 에피스테메에서 자연의 기능과 인간의 기능은 일대일로 대립함으로써 무질서한 병치와 존재물들의 연속 속에서 차이를, 혼란스러운 재현들에서 동일한 연쇄를 통해 드러나는 재현, 담론에 의해 인간은 자연과 연결되었다. 이때 인간은 결코 고유한 밀도를 지닌 실재나 인식의 대상이거나 자주적 주체로서 자리하지 않았다.(426)
고전주의시대 재현과 사물의 공통담론은 언어 안에서 맺어지는 명확한 재현과 존재였기 때문에 인간의 삶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푸코는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담론이 고전주의시대에 자명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그 시대의 에피스테메로서 의심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재현을 벗어나는 순간 코기토에 함축되어있는 존재방식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과 실증성
푸코는 유한성에 대한 인식을 인간의 사유 출발점으로 잡는 듯하다. 생명의 존재방식 즉, 육체를 통해서, 욕망을 통해서, 언어를 통해서, 내 사유의 사슬을 따라 모든 경험적 실증성의 바탕에서 유한성을 간파할 수 있는데 푸코는 근본적으로는 다른 유한성으로 눈길을 돌리게 한다. 근대적 성찰이 유한성 자체에 호응하면서 동일자의 형상을 띠고 실증성과 실증성의 토대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과 차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433)
근대적 사유에서 ‘생명, 생산, 노동’에 대한 실증성은 한정된 경험의 제한된 성격을 부여함과 동시에 알 가능성에 확실한 근거를 제공한다. 경험내용이 재현의 공간에 놓여 있을 때 요구되었던 무한의 형이상학은 이제 쓸데없어졌고, 자기 이외의 어떤 다른 준거도 갖지 않게 되면서 유한성에 의해 서양 사유의 전 영역이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적 사유는 인간의 출현과 동시에 형이상학의 종언을 요구하게 되었다.
인간이 출현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는 모든 곳에서 동일자로서의, 보편적인 인간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인간이라는 척도가 생겼다는 것이다. 나의 욕망을 인간의 욕망과 겹쳐 볼 수 있어야 경제학의 실증성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사실 욕망은 하나로 수량화 할 수 없이 다 다른데 ‘욕망하고 있는’ 인간이 있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해야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한의 사유에서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구체적 인간과 인간의 삶을 열었다. 육체를 지니고 노동하며 사유하는 삶의 인간, 각 지식의 역사적이고 일반적인 선험적 여건을 찾아내는 고고학 층위의 근대인(436)을 말이다.
후기가 늦어 죄송합니다~
특히 유한성에 대한 부분이 어려웠는데요. 샘들의 열띤 토론을 담아내지 못하고 짧게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샘들이 보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허허허 저는 샘 얘기를 좀더 듣고 싶었는데, 토론한 내용을 정리해주셨네요~ 성실한 정리도 좋지만 토론에서든 후기에서든 샘이 읽고 느낀 푸코 이야기를 들려주시와요~~
세미나에 빠져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갔을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샘이 정리를 잘해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