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어렵습니다! 분량을 조절해서 읽었는데도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 재밌습니다! 개인적으로 전력을 다해(?) 책을 읽는 경험을 오랜만에 다시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대충 이러저러한 말이겠거니 하고 읽어서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는 책이다보니 한 단락, 한 문장, 한 단어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뇌가 좀 말랑말랑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그동안 『말과 사물』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감을 잘 잡지 못했습니다. 푸코 평전을 읽으며 푸코에게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으나 그것도 잠시. 『말과 사물』을 펼쳐드니 너무 깜깜했죠. ‘이 수수께끼 같은 책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마치 보르헤스의 중국 백과사전을 접한 사람처럼, 지식의 범주가 흔들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역사책이라고 하기엔 어떤 사실이나 인과의 기술 이상이 담겨 있는 듯하고, 분명 비판서인 듯 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고요.
그러다 후반부에 이르러서 약간씩 느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 푸코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의 좌표를 측정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3차원의 좌표가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공간이 변하고 공간과 더불어 시간이 변하는 4차원의 좌표를 지식의 역사 안에 구성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연속성 속에서 우리 자신의 자리를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범주들을 뒤흔듦으로써 우리 시야의 맹점을 노출시키는 듯합니다.
막바지에 와서야 『말과 사물』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이 조금 잡힌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현대성에 대한 첨예하고 거의 예언자적인(앞날을 예측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식적인 인간들은 감지하지 못하는 징후를 읽어낸다는 의미에서?) 진단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지요. 우리가 당연하게 그 존재를 전제하는 인간.
그런데 이 인간이 “지식의 조물주가 고작 200년 전에 손수 만들어 낸 최근의 피조물”(『말과 사물』, 424쪽)이라면? 인간이 인식의 주체이자 대상, 실증성의 근거이자 학문의 주된 표적이 된다는 것에 어떤 근본적인 역설이 숨겨져 있다면? 『말과 사물』을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인간’에 대해 어떤 새로운 시야를 확보하게 될까요?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낯설게 보이게 될까요? 얼마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듯한 ‘포스트 휴머니즘’ 담론에 합세하게 될까요? 분명한 것은 얼마나 품을 들이고 어려움을 감수하느냐에 따라서 『말과 사물』은 분명 현실을 낯설게 보게 해줄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 텍스트라는 점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읽고 세미나한 내용들을 조금 정리해보겠습니다.
인간, 경험적-선험적 이중체
푸코에 따르면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경험적-선험적 이중체가 되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인식이 인간 안에서 획득된다고, 인식에 주어지는 경험 내용으로부터 인식의 조건을 밝히는 것이 중요해진다고 푸코는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경험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경험을 구성하는 선험적 조건을 이루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희소성의 원칙에 의해 규정되고, 말의 두께에 짓눌리며,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리 조직망이나 유기적 구조에 의해 드러나는 생명의 표현으로서 존재합니다.
욕망을 지니고 있고, 특정한 언어로 말하며, 육체를 갖고 있는 존재. 그런데 이러한 유한성은 인식을 제약하는 무엇이 아니라 인식 자체를 위한 조건이 됩니다. 신의 자리에 인간을 놓는다는 게 이런 걸까요? 근대는 경제에서, 자연에서, 언어에서 인간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무한에 대한 관념이나 어떤 전체론적인 관점 없이도 지식의 실증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푸코는 이것이 인식의 진보라거나 과학적 사고의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이중화의 결과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무언가 참고할 것이 없을까 찾아보다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들춰보았는데요. 들뢰즈는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인간과학들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행동action, 적극적인 모든 것에 대한 몰이해가 인간과학들 속에서 터져나온다.”(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민음사, 140쪽) 그러니까 니체가 보기에 인간과학들은 운동하고 변형하고 해석하고 행위하는 적극적인 것들이 아니라 항상 평균적이고 수동적이며 반응적인 측면들에 초점을 맞추더라는 것이죠. 가령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는 발화자의 관점이 아니라 청자의 관점에서 언어를 파악하려 한다는 점에서 언어학을 비판했습니다. 의미작용이나 문법, 언어적 규칙성에 주목할 뿐 법칙을 만들고, 해석을 부과하고, 의미를 변형하는 적극적인 힘의 차원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죠.
니체가 다른 학문들보다도 ‘인간과학’에 내재한 적극적인 것에 대한 몰이해를 콕 집어 지적했다는 점이 재밌습니다. 어쩌면 인간을 지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에 대한 반응적 해석을 함축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지식의 대상이자 실증성의 조건으로 출현한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로 되어가고 있는 존재, 이행하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인식 가능하고, 평균적이며, 규범화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죠. 푸코 역시 이런 문제를 의식합니다. 그에 따르면 경험적-선험적 이중체로서의 인간이 구성되었을 때 발생한 두 가지 분석, 즉 선험적 미학으로 작용하는 분석과 선험적 변증법으로 구실하는 분석은 실증주의와 종말론 사이를 오가게 됩니다. 실증주의적으로 인간을 대상화하고 축소하거나, 종말론적으로 심판의 날에 드러날 진실과 되찾게 될 인간의 본성을 약속하거나.
현상학은 주체로서의 인간에 집중하여 체험의 분석을 시도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인간의 경험내용 그 자체에 접근하려는 시도, “인간에게서 경험적인 것이 선험적인 것을 대신하도록 하려는 시도”(440쪽)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푸코는 실증주의와 종말론, 체험의 분석을 관통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가능한 것인지를 질문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인간’이 정말로 존재하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이것은 위버멘쉬를 말했던, 인간을 되어가는 중에 있는 것이자 자기극복의 과정으로서 바라보고자 했던 니체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말과 사물』 9장을 끝까지 읽고 과제를 작성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성연샘, 과제 출력은 훈샘과 성희샘입니다. 그럼 다음주에 뵈어요~
전적으로 건화샘의 읽기에 공감합니다. 정말 책 한권을 이렇게 전력을 다해 읽은 적은 평생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 낱말의 밀도, 한 문장, 한 문단의 깊이에 골이 흔들리면서도 홀린 듯이 헤치고 나아가게 만드는 이 힘은 대체 어디서 오는 힘인걸까요? 저는 죽은 푸코의 영혼에 지배당한 것 같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읽어나가다 보니 , 저는 묘한 힘을 얻게됐다는 느낌이 드는데, 텍스트를 텍스트로 만난다는 것이 어떤 건지 감이 잡히는 것 같아요. 저도 '유한성의 분석론'을 다시 꼼꼼히 필사를 해가며 읽었습니다. 버릇처럼 '인간은 유한하다'고 되뇌는 이 문장 이 이토록 두꺼운 말이었나 새삼 감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