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인간이 정말 존재하는지 자문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와 사유 그리고 진실은 무엇일 수 있을까 하고 한순간이라도 상상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고들 생각한다. 이는 최근에 이루어진 인간의 출현에 우리가 너무나 눈이 멀어, 세계와 세계의 질서 그리고 인류가 존재했지만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를 그리 오래전이 아닌데도 이제는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441쪽).”
<말과 사물> 9장의 4.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5.코기토와 사유되지 않은 것은 지난 시간에 읽었던 유한성에서 인간이 어떻게 근대 지식의 대상이자 인식의 주체로 출현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풀어갑니다. 푸코는 우리가 근대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을 인간이라 불리는 경험적-선험적 이중체가 구성되었을 때로 봅니다. 인간은 맥락 속에 놓여있기에 구체적 조건 속에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 속에 놓인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경험합니다. 동시에 나의 경험은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이 됩니다. 이는 두 종류의 분석을 낳았습니다. 인식의 본질이 인간에게 있으며 해부생리학적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려는 선험적 미학 분석과 인식에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있으므로 그 인식의 역사를 밝히려는 선험적 변증법의 분석이 그것입니다.
푸코는 이 경험적 내용을 중시하는 선험적 반성에서 참된 담론의 지위에 주목하여 두 경향을 뽑아냅니다. 참된 담론이 경험적 진실에서 참된 담론의 근거와 본보기를 발견하려는 실증주의적 유형의 분석이 대두됩니다. (대상의 진실은 대상의 형성을 묘사하는 담론의 진실을 결정한다.) 또한 참된 담론에 의해 진실의 본질과 역사를 규명하려 하는 종말론적 담론이 행해집니다. 그러는 가운데 담론은 대상을 앞지르게 되고 먼저 개략적으로 묘사하고 유발하게 됩니다. (철학 담론의 진실은 형성 중인 진실이다.) 마르크스가 심판이 올 때에 완전한 세상을, 인간은 약속되어진 존재임을 예고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됩니다. 경험적인 동시에 비판적이고자 하는 담론은 실증주의적인 동시에 종말론적일 수밖에 없고, 양자 택일이라기보다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인간은 실증주의에 의해서 얄팍하게 축소되고 종말론에 의해서 저 멀리 있는 어떤 것으로서 약속됩니다. 아직 어디에서도 인간이 온전히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선험적인 것의 차원에서 경험적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푸코는 이점을 “전(前)비판적 순진성”(439쪽)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인간을 주체로 세울 담론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체험의 분석, 현상학입니다. 체험의 분석은 실증주의와 종말론을 철저히 부인하면서 확립되었고 경험적인 것으로 축소된 진실의 담론과 인간이 결국 경험되기에 이르리라고 순진하게 약속하는 예언적 담론을 물리치고자 했습니다. 체험(몸)은 육체의 공간과 문화의 시간을 함축합니다. 실증주의는 대상의 의식을 다루지만, 현상학은 우리의 의식이 이 대상을 지향합니다. 즉 대상에 초점을 맞추다가 이제 대상을 향한 지향점이 있는 우리의 의식, 바로 그곳에 있는 체험의 영역을 현상학이 분석합니다. 현상학은 우리의 의식에 주어진 것으로서의 현상에 집중한다는 면에서 인간의 선험성을 복원하고자 합니다. 실증주의가 외부적 조건을 분석했다면 현상학은 주체성에 근거를 제공합니다.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을 비롯하여 <말과 사물>을 준비하며 함께 읽었던 현상학을 세미나 시간에 상기했습니다. 푸코는 체험의 분석이 경험적인 것이 선험적인 것을 대신하려는 시도에서 요구된 것을 더 세심하게 충족할 뿐이라며, 실증주의, 종말론과 현상학의 관계란 대립이 아니라 인간이 경험적-선험적 쌍으로 출현한 순간부터 서로를 필요로 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고전주의 시대에는 생각한다가 곧 존재한다로 자명하게 연결됩니다. 모든 사물들의 존재는 사유로 귀착되고, 존재의 근거가 생각하는 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는 생각한다의 출현이 생각되지 않는 것과 쌍둥이처럼 함께 출현합니다. 오류, 환각, 꿈, 광기, 즉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사유의 경험. 근대 코기토는 사유와 사유되지 않은 것 사이의 거리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사유와 사유되지 않는 것 사이의 맞물림을 질문하고 가로지르고, 오히려 사유되지 않은 것쪽으로 나아가고 재활성화합니다. 코기토에서 “나는 생각한다”의 우위를 몰아내고 존재론의 물음으로, 사유되지 않은 것의 존재론으로 향합니다. 근대적 코기토는 명백한 진실의 발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시 떠맡아야 할 숙제입니다. 존재의 단언이 아니라 존재와 관련된 일련의 물음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유한성의 토대에서 사유되면서, 사유 자체를 사유하는 사유의 특권이 사라지면서 가능해졌습니다. 사유가 특권을 잃어버리자 인간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게 했고, 이제 인간이 온전히 보이게 됩니다. 무의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푸코는 무의식을 인간이 더 이상 이전 반성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유하지 않을 때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객관적이고도 과학적인 사유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것으로 봅니다(447쪽). 데카르트의 철학과 칸트의 분석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반성의 형태, 즉 사유가 사유되지 않은 것을 겨냥하고 사유되지 않은 것과 맞물리는 이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를 역사상 처음으로 끌어들이는 반성의 형태(현상학)가 확립됩니다. 이제 사유되지 않는 것들, 그것들을 온전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식 자체가 자기가 아닌 타자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타자, 사유되지 않은 것은 인간과 동시에 탄생한 쌍둥이 형제입니다. 인간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이자 은밀한 동반자이고 끈질긴 분신이기도 한 타자는 또 어떤 점에서는 인간을 인식할 가능성이 생겨나는 맹점이기도 합니다. 타자는 헤겔의 현상학에서는 대자와 마주하는 즉자이고, 쇼펜하우어에게는 무의식적인 것,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소외된 인간, 후설의 분석에서는 암묵적인 것, 비현실적인 것, 침전된 것, 실행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타자는 인간의 진실한 모습이 흐릿하게 비치는 투영처럼 반성적 지식에 제공되지만 결코 자율적인 방식으로는 숙고되지 않기에, 근대적 사유에서는 무의식에 정신을 집중해서 포착할 필요가 생깁니다.
근대의 사유는 실증적이며 인간에 대한 규정을 포함합니다. 인간 소외를 사유한 마르크스 경제학은 바로 정치화됩니다. 마르크스는 기존에 사유되지 않은 인간을 사유했습니다. 사유되지 않은 것을 되찾을 것을 근대는 명령합니다. 광기를 사유하면서 정신의학은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었습니다. 사유가 지식인 동시에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변경이고, 반성인 동시에 존재 방식에 대한 변형입니다. 사유와 사유되지 않은 것 사이의 간격 속에서 인간의 존재가 펼쳐지고 이것이 인간의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사유는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움직이게 합니다. 푸코는 사유가 움트기 시작할 때부터 사유는 행위라고, 그것도 위험한 행위라고 말합니다(450쪽). “작동하자마자 손상시키거나 화해시키고 접근시키거나 멀어지게 하고, 단절시키고, 분리하고, 잇거나 다시 잇고, 해방시키거나 예속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449쪽). 사유는 이제 이론이 아니라 행위입니다. 푸코는 이 사실을 사드, 니체, 아르토, 바타유는 이해했으며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는 알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세미나에서 말해졌듯이, 이 중에서도 일종의 정신 질환을 앓았다고 알려진 사드, 니체, 아르토는 인간을 객관적 실증적 앎으로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광기와 감옥에 대하여 사유한 푸코,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확성기를 대주고자 했던 푸코의 이미지도 떠오릅니다. 사유하는 것 자체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리게 해주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해주는 행위라는 면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그들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푸코는 다음과 같이 9-5를 끝맺습니다. “근본적으로 근대적 사유는 인간의 타자가 반드시 인간과 동일한 것으로 변하게 되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450쪽).” 아, 이 문장을 읽고 제가 맞게 이해한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앞부분을 읽었음에도 역시 저는 약속된 인간을 확인시켜주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나봅니다. 그러나 그랬다면 그건 푸코가 아니지요. 결국 다른 분들의 발제문과 세미나에서 제가 이해한 바로는, “타자를 사유한다는 것은 그들을 솟아오르게 하고 현실화하려는 의지”이지만, “타자를 사유하며 자신의 존재를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00샘 발제문). 이것이 “유한성의 분석론이 차이가 동일성으로 귀결되는 사유를 향해 열렸던 것처럼” “차이가 동일성과 같은 사유”입니다(00샘 발제문, 433쪽). 인간의 유한성이 이렇게 연결이 되네요. 크크랩 강의에서 채운 선생님은 "자의식, 즉 주체와 대상의 분리, 그 거리가 근대의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학적 진리인 이성으로 모든 것을 도표화하는 고전주의 질서는 인간의 주관이 발휘되는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는 신의 자리였던 그 수학적 중심점(소실점)에 근대는 인간을 놓음으로써 인간은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되고 주관을 확립합니다." (2022.08.27. 크크랩 채운 선생님 강의) 그러나 근대인은 무한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결국 인간 자체의 한계에 스스로 발이 묶이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긴 이야기였던 세미나가 끝을 향해 가면서 감동이 있었어요. 푸코 보살설! 여러 선생님들께서 이번 텍스트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푸코가 달리 푸코가 아니다” 등의 증언을 해주셨지요. 그 중에서도 늘 푸코에 진심이신 모 선생님께서 촉촉한 눈빛에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푸코는 … (말 고르기) … 보살이야!!!”라고 선언하신 건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기도 했고 따뜻한 공감을 자아내기도 했어요. 그러나, 저의 경우, 또 한편으로는 쓸쓸한 감정이 일었습니다. 인간을 향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는데 인간은 더 멀어지는 듯 느껴졌습니다. 인간이 낯설었습니다. 인간인 제 자신에 대해서도요. 근대는 존재에 대해 질문한다고 하셨죠. 엄마 손을 놓친 아이 같은 막막함. 지식의 대상이자 인식의 주체로 솟아오른 인간은 이제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요? 푸코는 아니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경험적-선험적 존재인 인간은 애초에 몰이해의 장소라고요. 오직 자신의 유한성을 근거로 해서만 이해 가능하다고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처지임에도 오만한 인간. 더 나아가 푸코는 인간 자체가 존재하는지를 질문합니다.
올해 1월에 막을 내린 <인간전(展)>. 그 전시도 인간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다시 찾아보니, 전시 기획 의도에서 밝히고 있듯이, 선별된 작품들은 우리가 읽고 이야기한 관점들을 전개하는듯 보입니다. 2021년 서울이라는 전제에서요.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이 확산된 20세기 중반의 전후 미술을 필두로, 휴머니즘의 위기 및 포스트휴먼 논의와 더불어 … 작품을 선보입니다. 이를 통해 마음과 몸, 이성과 비이성, 나와 공동체, 실재와 가상,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인간상을 조명하고, 지금까지 당연시해온 인간적 가치들에 대해 재고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움을 규정짓는 조건은 무엇인가? 나와 타자와 세계 사이의 경계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우리는 인간 너머의 낯선 존재들과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https://www.leeum.org/exhibition/exhibition02_detail.asp?seq=45) 여기서 인식의 조건은 하나로 규정되지 않고, 관람객은 인간의 분열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사유가 사유되지 않은 것들, 타자를 종횡무진하며 포착하고 자신으로 감싸버리는 것을 관람객은 목격합니다. 전시는 작품들을 통해 2021년의 자리에서 근대인간이 사라지고 있음을 인지하며, 그 이후 세계에 존재할 새로운 인간 혹은 비(非)인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인간전>도 여전히 인간이 무엇인지 답할 수 없습니다. 질문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경험적-선험적 인간은 파편화되고 카오스가 된 세계에서 타자와 맞물리며 끊임없는 질문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푸코의 말, 아직도 “인식에 의해 세계의 진실을 활짝 열어”주기를 기대하는가?(442쪽)” 선생님들께서는 푸코의 이후 사유가 구성된 주체 쪽으로 나아간다고 말씀하셨어요. 푸린이(푸코+어린이)는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푸코의 문장이 주는 울림에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의 격정적인 문체도 한 몫 하지요. 이를테면, “인간에 대한 우리의 근대적 사유, 우리의 인본주의가 천둥처럼 요란하게 울려오는 인간의 비존재 위에서 평온하게 잠자고 있었음”, “인간의 사유가 자신의 존재에 의해 휩쓸릴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이와 동시에 인간이 자신을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상기하는”... 다만, 귀결될 곳을 찾지 못하는 흔들림의 무작정 덜컥거림을 품고 있을 수밖에 없는 어려움, 거기에 동반하는 감정이 있네요.
<말과 사물>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렵다는 말은 우리 이제 하지 않기로 했지요. 울림의 진폭이 큰 선생님들 곁에서 여운이 길게 간다고 말하겠습니다.
오~ <인간전> 이야기 재밌네요! 여전히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는데 '어떤 조건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었고 물어야 했는지'를 질문한 푸코의 작업이 얼마나 전위적인(?) 것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텍스트 정리, 세미나에서 나온 이야기, 샘 생각 여러가지로 풍성한 후기네요. 잘 읽었슴돠~~
성연샘의 후기에서 저는 '푸린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참 어여쁜 이름이네요. 푸린이..푸린이 (푸코 어린이) ㅎㅎ
후기 잘 읽었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늘 처음 읽는 것 같은 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