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푸코에 따르면 칸트가 제기한 이 물음은 근대적 사유를 구성합니다. “인간학은 인간의 분석론으로서 확실히 근대적 사유를 구성하는 역할을 했다.”(푸코, 『말과 사물』, 466쪽) 그리고 푸코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에 관한 전(前)비판적 분석은 인간의 경험에 일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의 분석론이 된다”(위의 책, 467쪽)라고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지배는 더 산문적이고 덜 도덕적인 일로서 자연이나 교환 또는 담론의 인간을 인간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근거로 내세우기 위한 경험적-선험적 이중화이다.”(위의 책, 467쪽) 그러니까 근대의 ‘인간중심주의’ 혹은 ‘인본주의’란,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우리가 도처에서 ‘인간’을 발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더 많은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기보다는, ‘인간’이 탄생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경험 내용의 선험적 근거로서 생명을 지닌 인간, 욕망하는 인간, 말하는 인간을 자연스레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저는 푸코의 이러한 분석이 이후에 이어질 그의 작업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감시와 처벌』에서 그는 근대 형벌제도와 인간과학의 친연성에 주목합니다. “형벌제도가 ‘인간과학’과 이웃하게 된 지도 벌써 2백 년이 되어 간다. 인간과학은 형벌제도의 자부심이며, 형벌제도가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기 위한 방법이다. ‘나는 물론 완벽하게 정의롭지는 않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기다려, 내가 학자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라’ 이런 식이다. 그러나 심리학·정신의학·범죄학 등이 오늘날의 사법제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 학문들이 형성된 바로 그 지점에서 사법제도의 역사도 똑같은 정치적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인식, 그리고 징벌의 인간화 밑에는 인체의 규율, 예속과 객관화의 혼합된 형태인 ‘앎-권력’이 똑같이 들어 있다. 우리는 인체의 정치학의 역사로부터 근대 도덕의 계보를 만들 수 있을까?”(푸코, 『감시와 처벌』)
『말과 사물』에는 이러한 대목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푸코는 줄곧 근대적 사유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학)이 인간에 대한 통치 및 관리의 실천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며 정상-비정성이나 범죄성 같은 인식의 범주(혹은 대상)들을 생산해냄으로써 예속적 관계들을 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푸코는 ‘인간학의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그것은 아마도 근대적 인간학, 근대적인 인간 개념, 인간을 전제하는 근대적인 사유의 방식이 함축하고 있는 어떤 근원적인 무지와 폭력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푸코는 인간의 해방, 인간의 존엄, 인간의 구원 같은 것들을 떠들썩하게 논하는 근대적 담론과 인간 존재들을 동일화하고 상이한 경험들과 실천들을 규범화하는 움직임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겠지요.
푸코의 이런 말에서 어떤 환멸감과 단절에의 의지가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나 인간의 지배 또는 인간의 해방에 관해 여전히 말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 대해, 인간이 본질적으로 무엇인가에 관해 여전히 자문하고 있는 모든 이에 대해, (...) 사유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고 곧바로 생각하지 않고는 사유하려고 들지 않는 모든 이에 대해, 이 모든 어색하고 뒤틀린 형태의 성찰에 대해 우리는 철학적 웃음, 일정 부분 조용한 웃음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푸코, 『말과 사물』, 469쪽)
지금 우리는 어디에 와 있을까요? 한동안 '포스트 휴머니즘'이 유행이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고요. 아마 우리는 19세기나 20세기의 사람들처럼 '인간'을 순진하게 믿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인간은 이제 데이터에 의해 해체되고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존재니까요. 그리고 인간 운운하는 거대한 담론들이 기세를 잃고 있는 형국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쩌면 우리의 반인간주의 혹은 탈인간주의는 근대적인 '인간'을 전제하고 그것의 죽음 혹은 소멸을 논하거나 인간의 공과를 따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푸코는 "인간의 사라짐에 의해 남겨진 공백"이 사유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말하는데, 그 공백이란 어떤 것이며 또 그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다시 시도해볼 수 있을지 아직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10장을 마저 읽고 채운샘 강의도 듣고나면 뭔가 또 보이는 게 있겠죠?
다음 주에는 채운샘 특강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간식은 경혜샘 (다음 주) 후기는 새벽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