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는 9장 인간과 인간의 분신들 중 6. 기원의 후퇴와 회귀 7.담론과 인간의 존재 8.인간학의 잠에 대해서 토론했습니다.
푸코가 인간의 존재 방식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특징짓는 마지막 요소로 설명한 것이 ‘기원에 대한 이해방식’입니다. 먼저 고전주의 사유 속에서의 기원과 근대적 사유의 기원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18세기에 기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재현의 순수한 이중화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가장 앞선 것이 아니라 가장 닮은 기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재현의 순수한 이중화는 재현하는 것과 재현되는 것의 완벽한 일치로 이해되었는데, 예를 들어서 물물교환에서 교환되는 것은 재현의 가치(욕망)가 동등할 때 이루어진다는 관점, 자연의 질서는 닮음의 도표에서 찾을 수 있고 기원은 그 극단으로 향하는 것, 언어의 기원은 사물과 재현(외침, 소리, 몸짓) 사이의 투명성 같은 것입니다. 인식의 기원도 재현의 순수한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재현의 연쇄에서 보다 앞의 비슷한 감각에서 인식의 기반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재현의 동일성이 더 이상 존재물의 질서를 완전하게 드러내지 않게 된 시기부터 지식은 도표의 방식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게 됩니다. 19세기 초에 지식의 새로운 배치의 양상은 생산 양식과 관련하여 경제학상의 역사성, 결핍과 노동과 관련하여 인생의 유한성, 그리고 단선적인 경로를 구성하는 역사의 종언으로 드러납니다. (p365) 지식은 이제 도표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계열, 연쇄, 발전의 방식으로 구성됩니다. 근대적 사유에서는 노동, 생명, 언어가 고유한 역사성을 획득해서 각각의 역사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역사성을 가지는 것과 그 기원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은 달라집니다. 역사성의 구조 자체에서 역사성에 내재하지만 동시에 역사성과 무관할지 모르는 기원의 필요성이 드러납니다.(p452) “원뿔의 가상 꼭젓점 같은 기원’이라니! ‘이 경우에 기원은 모든 차이, 모든 분산, 모든 불연속이 빠짐없이 모여들어 동일성의 단일한 지점이자 동일자의 만져지지 않는 형상만을 형성할 뿐이지만 스스로 폭발하여 타자가 될 힘을 지니고 있는 원뿔의 가상 꼭짓점 같은 것이다.” (p452) 동일성으로 향해 가지만 그 형상만을 상상할 수밖에 없고, 기원을 상상하자마자 기원의 대상과 분리되어 대상과 다른 타자가 되는 기원이라는 말로 거칠게 해석해보았습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기원을 사유하는 것은 더 기묘한 방식입니다. 인간이 출현하면서 근대적 사유는 그 유한성을 분석하는 것이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때의 기원과 시초의 문제는 이미 자기가 사물과 관계 맺는 내에서 한정됩니다. 노동, 생명, 언어와 같이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이미 시작된 것을 배경으로 해서입니다. 이는 인간이 사실상 이루어진 역사성과 연관되어 있을 때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에게 인간과 가장 가까운 것을 떠올리는 순간부터 인간이 되살리는 것은 인간을 거의 지배하는 시간의 모든 매개물(p453)입니다. 인간이 소통하기 시작하고 이미 구축된 이해의 망 안에 놓이는 것은 시간의 매개물-노동과 생명 그리고 언어에 의해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침전된 복잡한 매개물-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적 사유에서 인간에게 기원적은 것은 동일성이나 동일자가 아니며, 인간보다 더 오래되고 인간이 제어하지 못하는 내용과 형식을 인간의 경험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며, (....) 인간 자신과 동일한 시대에 속하지 않는 것에 인간을 연결하고, 인간과 동시대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인간에게서 해방하며, 사물이 인간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 바로 이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인간의 경험이 또한 사물에 의해 전적으로 구성되고 제한되는 만큼 누구도 인간에게 기원을 지정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끊임없이 보여준다. (p454)
사물의 시초가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인간에 의해서지만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기원을 사유하는 주체가 된 만큼 사물의 기원과 대조적으로 인간은 기원이 없는 존재, 결코 접근하기 쉽지 않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시간 속에서 인간은 모든 기원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이미 현존하는 존재(p455)가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푸코는 ‘인간은 어느 순간에 절단된 지속의 부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간 일반이 재구성될 수 있고 지속이 가능해지고 사물이 적절한 시기에 출현할 수 있는 통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푸코는 “사유의 책무”에 대해서 말했는데, 시간의 가능성이 구성되는 방식을 재발견함으로써 사물의 기원에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사물의 기원에 이의를 제기할 책무가 사유에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이 사유의 책무가 무엇일지 한참을 토론했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첫 시작을 밝히는 새벽과 같은 기원을 설정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근대에는 이 기원을 따라가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사물 자체의 견실한 선행성으로 인간의 직접적 기원의 경험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견실한 선행성을 다시 물어볼 책무가 있다는 것 아닐까요. 사물은 인간의 관계 속에서 출현하는 세계이고 인간은 인식 속에 질서 지어진 대상 즉 개념, 관습, 사물, 노동, 생명, 언어 안에서 이미 살고 있기 때문에 이미 견실한 선행성만을 경험하니까요. 이 사유의 책무는 시간의 유동적인 요소 속에 자리하는 모든 것이 문제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는데 아직도 이 사유의 책무에 대해서는 명확히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다른 말로는 근대적 사유는 기원적인 것의 영역을 복원하려는 책무를 스스로 떠맡음으로써 거기서 또 곧장 기원의 후퇴를 발견했다고도 합니다. 기원의 복원하려는 시도를 하자마자 발견한 것이 기원의 후퇴라니. 기원의 복원과 후퇴를 반복하고 있는 이 불변의 불안한 상태를 극복하고자 한 시도로 - 헤겔, 마르크스와 스펭글러- 행복하지는 않지만 완전한 회귀를 발견하거나, 횔덜린, 니체, 하이데거의 경험처럼 기원의 극단적인 후퇴 속에서만 회귀가 자리하고 기원이 물러나는 그만큼만 기원을 해방하는 부단한 파열인 동시에 그 극단에서 기원을 찾는 사유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푸코는 양자 모두 ‘동일자’ 같은 어떤 것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모두 근대적으로 보았습니다. 모두 우리로 하여금 동일성을 회복한 또는 불가능한 인간, 반복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역사와 시간,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되돌아가고자 애쓴 점에서 모두 인간을 전제한 근대적 사유라고 말입니다. “유한성은 동일자의 형상을 띠고서 실증성과 실증성의 토대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과 차이이다.”(p433)
오히려 자기와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기원을 사유해야 하는 무한한 책무를 가진 사유의 힘이 인간의 고유한 존재의 힘이 되며, 이때의 시간은 경험의 기반으로서 이전과는 다른 시간입니다. 근대의 경험에서는 기원을 통해 경험의 실증성이 밝혀지므로, 기원의 후퇴는 모든 경험보다 더 근본적이며, 유한성은 인간의 존재가 시간과 맺는 극복불가능한 관계로 드러나게 됩니다. 근대적 사유는 기원의 검토를 통해 인간의 유한성 즉 인간의 존재 방식을 재발견했습니다. 19세기 이후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분석은 재현의 연쇄나 도표에서 이루어 질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사물이 재현에 주어지는지, 어떤 조건과 근거, 한계를 가지고 사물이 드러나는가를 보여주는가를 문제로 삼았습니다. 근대적 사물의 질서 내에서 인간이 발견한 것은 스스로의 근본적인 유한성 즉 인간을 기원으로부터 떼어 놓고 동시에 인간에게 기원을 약속하는 분리, 시간의 극복불가능성이었습니다. (p462)
담론의 분석이 유한성의 분석론으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의심되지 않은 재현의 자명성에 근거를 둔 고전주의적 담론의 실재는 근대적 사유에 의한 인간의 삶에 대한 숙고와 공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푸코는 인간의 분석은 재현하는 담론의 분석이 일단 해체되고 전이되고 뒤집힐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책무는 우리 문화에 알려지지 않은 사유 방식, 즉 인간의 존재와 동시에 언어의 존재를 연속성도 모순도 없이 성찰할 수 있게 해줄 사유 방식을 어떤 힌트도 없이 찾아 나아가야한다고 합니다.
다만 유한성의 분석론은 결과적 측면에서 반대의 역할을 했는데, 인간이 한정된 존재라는 점에서 그 한정의 토대가 인간의 존재 자체라는 점, 경험 내용이 이미 경험 내용 자체의 조건이라는 것, 사유되지 않은 것에 사유가 사전에 붙들려 있다는 것, 인간과 동시대적이지 않은 기원이 어떻게 인간에 대해 후퇴하고 임박한 것으로 주어지는가를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푸코는 유한성의 분석에서 관건은 어떻게 타자 또는 먼 것이 또한 가장 가까운 것이자 동일자인지를 보여주는 것, 즉 차이의 영역에 대한 성찰에서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정복되어야 할 동일자의 사유로의 이동이라고 합니다. 근대적 사유는 차이의 형성이 아니라 동일자로 나아가는 사유이기 때문에 후자의 사유에 이르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상호작용과 형이상학 없는 존재론이 요구됩니다.
“시간은 공간의 근거가 되었다. 근대적 사유에 의하면 사물의 역사 및 인간에 고유한 역사성의 토대에서 드러나는 것은 동일자의 내부에 빈틈을 초래하는 간격이다. 근대적 사유가 여전히 시간을 사유할 수 있는 것, 시간을 연속으로 인식하고 시간을 완결이나 기원 또는 회귀의 약속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깊은 공간성 덕분이다”(p466)
동일성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동일성을 구성하는 간격 때문에 온전하지 않은 동일성과 거리를 두는 반복 즉 시간과 관련됩니다. 아직도 동일성으로 향하는 사유가 왜 시간을 필연적으로 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푸코의 설명으로는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기원에 대한 사유 자체가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 진보와 후퇴를 드러낸다는 것에서 시간성을 내포하는 것이지만 이때의 시간성은 단선적인 개념일 것입니다. 하지만 푸코가 말하는 근대적 개념의 시간성은 기원에 근접할수록 기원이 후퇴하는 그런 시간이고 기원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잡히지 않는 기원으로 본다면 근대적인 기원은 그 시간성을 벗어난 것으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인간의 유한성의 근거가 되는 깊은 공간성을 지니게 하는 시간은 단선적인 시간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재구성되는 역사적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요? 기원과 역사성, 시간을 마구 혼동하고 있는 것인가요? 기원과 시간, 기원의 발견과 후퇴, 동일자로의 회귀, 유한성과 시간성의 개념이 무척 어지럽게 엉켜있는 중입니다. 다만 지금 우리는 시간을 공간과 관계하는 것으로밖에 경험하지 못한다는 한계에 직면해 있는 것은 알겠습니다. 시간은 인간의 경험적인 공간 분할일 뿐이지 절대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니까요.
고전주의와 근대의 불연속적 지점에서 인간은 지식의 대상인 동시에 인식의 주체라는 모순적인 입장을 띠고 출현합니다. 근대의 인간학은 인간의 근거를 인간에게서 찾으려했습니다. 근대적 사유는 유한한 것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사유하기 때문에 인간을 사유할 수 있게 합니다. 자연이나 교환 또는 담론의 지식의 토대를 인간 자신의 유한성에서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푸코가 비판하는 점은 표면적인 인본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척도에서 나오는 사물의 질서를 가지고 인간 스스로의 근거, 인간의 유한성의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푸코는 인간학을 공격한 최초의 시도를 니체에서 발견했습니다. 니체의 문헌학적 비판은 "인간과 신이 서로에게 속하고 신의 죽음이 인간의 사라짐과 같은 뜻을 지니고 약속된 초인의 출현이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임박한 죽음을 온전히 의미하는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p468)입니다. 그러면서 인간학은 해체되고 있는 중이라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지배, 해방, 인간의 본질을 말하고자 하며 인간을 출발점으로 하는 진리나 모든 인식을 인간 자신의 진실로 귀착시키려고 하는 것, 사유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고 곧바로 생각하지 않고는 사유하려 들지 않는 모든 이들을 비판적으로 고발하기 시작하는 만큼 우리의 눈앞에서 해체되고 있는 중이다.” (p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