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8장 9장에서 푸코가 말하는 내용을 관통하는 채운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관건은 채운샘의 결론적인 강의 내용이 우리가 직접 읽고 있는 텍스트 어느 부분에서 도출되는 말인지를 우리가 알아채야 한다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을 향해가는 과정, 세부 내용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그 결론이 명쾌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이 늘 난제죠. 그래도 채운샘의 강의를 다시 들으며 ‘아, 푸코가 이 말을 하고 있는 거구나...’에 좀 더 가까이 간 느낌입니다. 7장 8장을 읽은 게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책을 펼치니, 또 책은 (강의와 다르게) 딱딱하기 그지없습니다. ㅠㅠ 하여, 본문과 강의 내용을 종합하여 후기를 써보려고 했던 원대한(?) 포부는 바로 내려놓습니다.^^ 추석 장도 봐야 하고, 10장 50여 쪽을 한 주에 읽어야 하고, 게다가 ‘근대의 에피스테메와 나의 앎’이란 에세이까지...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텍스트 본문 내용과 채운샘의 강의를 종합하면 결국 ‘근대의 에피스테메’가 될테니, 이건 바로 우리 모두의 숙제이지 않습니까? ㅎㅎ
#유한성의 분석
고전주의 시대 사람들이 동물보다 식물을 더 좋아해서 식물을 많이 연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전주의 시대 지식의 형성 방법, 지식의 실증성이 ‘가시성’에 기반하여 그 생물의 구조와 특징을 가지고 도표 안에 분류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근대에 사람들이 늘 있어왔던 ‘인간’에 갑자기 주목한 것이 아니다. ‘인간’에 주목하고, 그런데 그 인간은 ‘유한하구나’라고 말한 게 아니다. 고전주의 시대 지식의 실증성이 ‘질서’에 입각해 있었다면 근대는 ‘역사’로 그 실증성을 획득한다. ‘시간성’ ‘깊이’가 지식을 형성하는 방법이었다. ‘인간의 출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근대가 ‘유한성’을 사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있다. 그럼 이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단 말인가? 언제고 인간이 유한하지 않았는가? 이런 질문들이 스친다. 일단 푸코의 말을 믿고 보면, 근대 이전의 형이상학은 ‘유한’이 아니라 ‘무한’을 사유한 것으로 보인다. 무한의 형이상학!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왠지 철학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것(본질)을 사유했을 것 같다. 유한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시간성’, ‘깊이’, ‘변화’를 사유한다는 말과 같다. 지식의 실증성이 ‘역사, 시간’에 의해 주어지며 유한성이 사유되자, 그 고고학적 지평에서 ‘인간’이 솟아올랐다. 근대가 ‘구성’한 ‘인간’은 시간의 깊이를 가진 유한한 존재이다. 고전주의 시대 인간은 다만 ‘사유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유한성 자체에 대한 한없는 참조 속에서 유한성이 사유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 문화는 우리가 근대성을 알아보기 시작하는 문턱을 넘어섰다.”(436)
## 언어
“르네상스 시대 언어는 본디 문자, 사물 위의 자국, 세계에 퍼져 있고 세계의 가장 지우기 힘든 형상들 중의 하나인 표지의 단순한 물질적 형태로 존재한다.”(80)
“17세기와 18세기에는 언어의 고유한 존재 방식, 즉 세계에 새겨지는 유구하고 견고한 사물로서의 언어가 재현의 기능 속으로 ‘사라졌고’ 모든 언어가 담론으로서만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82)
19세기. “이제 언어는 다른 재현을 마름질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재현 체계가 아니라, 가장 지속적인 행위, 상태, 의지를 어근으로 지칭하는 것이고, 언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본래 보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행해지거나 감내되는 것이며, 언어가 마침내 사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보여 주는 것은 사물이 이 작용의 결과나 대상 또는 수단인 범위 내에서인데, 명사는 복잡한 재현의 도표를 마름질한다기보다는 활동의 과정을 마름질하고 중도에서 끊고 굳힌다. 언어는 지각된 사물 쪽이 아니라 활동 중인 주체 쪽에 뿌리를 내린다.”(401-402)
“19세기 초, 즉 언어가 대상으로서의 밀도를 갖추고 지식이 언어에 속속들이 스며드는 시대에, 문학이란 말은 접근하기 어렵고 탄생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고 순수한 글쓰기 행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독자적인 형태로 다른 곳에서 재구성되었다.”(415)
### 인문과학
옛날에, 20세기에, 인문과학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궁금해 하시는 분이 많았는데, 갑자기 커밍 아웃!!) 그때도 제가 희한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딱히 해결의 지점까지 가보지 않았던 것이 그냥 인문대학이 아니라 인문‘과학’대학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자연‘과학’대학은 이해가 되고(왠지 자연은 과학의 영역인거 같고요...), 사회‘과학’대학도 나름 이해는 되었습니다.(인간이 집단으로 있으면 확률, 통계 뭐 이런 게 있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인간’을 이해하는데 ‘과학’이라는 말을 붙인 건 무슨 이유인지 잘모르겠더라구요... 지난 번 ‘무의식’이 사유가 아니라 인간을 경험적으로 종합하면서 이해하려고 할 때 나온 ‘객관적’ ‘과학적’ 탐구의 결과가 아닐까? 라는 푸코의 말도 떠오릅니다. 암튼 10장을 읽어보면 그 의문이 좀 풀릴까요? 영어(언어) 영문(문학), 분명 19세기의 언어와 19세기에 탄생한 문학의 공간 속에 제가 뭔지도 모르면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살았던 20세기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알아가는 것, 흥미진진합니다.
#### 회귀
그런데, 왜 추석은 자꾸 돌아오는 걸까요? 바라지도 않는데 말이죠...^^;;;;
끝.
발랄한 후기네요ㅋㅋㅋ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새벽샘의 에세이 예고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