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물>에서 3장과 4장의 재현하기, 말하기를 푸코의 연구방법에서 부터 바깥을 사유 하기, 불연속, 질서화, 인식의 발생문제를 투명한 언어로 설명해주신 채운샘의 강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으로 후기를 대신합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어떤 힘들이 주름 잡혀 내재해 있는 바깥을 사유하라.
역사의 불연속이란 늘 생성되어 있는 관점이 아니라 어떤 사건과 마주침에서 배치를 바꿔낼 새로운 힘,
바깥에 잠재해 있던 힘의 생성에 주목하는 것.
푸코의 사유방식은 어떤 앎이나 실천을 구성하는 조건을 사유하는 것이다. 세상을 지식화 하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 구성되지? 출현하지? 를 질문한다. 푸코는 위대한 개인, 위대한 철학자는 없다. 특정한 조건속에서 주름으로 존재하는 것이 주체이고, 주름 접힌 결과가 주체이다. 주체가 개인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 시대 앎의 실천은 어떤 주체에게 내면화된 결과의 주름인 것이다. 주체는 그 시대의 특정한 앎과 실천에 여러 지침들을 주름져 놓은 존재인 동시에 그 주름을 펼치기도 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그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사람들에게 내면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근대의 인간은 근대적 사고방식이 주름 잡혀 있는 것이다.
푸코의 불연속은 이 시대와 저 시대가 달라서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를 구성하는 다양한 힘들이 그 시대로 환원되지 않은 것을 함축하지 않은 시대는 없으며 동시에 그 시대로 환원되지 않는 바깥이 존재한다. 역사는 연속성에서 진전되어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연속성에서 무언가 새롭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시대 건 하나의 안(내부)를 갖고 있는 동시에 바깥을 갖고 있다. 푸코는 불연속 사유를 통해서 그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다. 바깥을 사유한다는 것은 그 시대안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어떤 힘들이 주름 잡혀 있다. 바깥은 일종의 잠재성 같은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내재하는 바깥이라고 했다. 여러 사고, 행위 양식 등과 관계를 형성 하는게 나인데 내가 결심을 하면 사고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나의 중심적 사고와 관계들로 환원되지 않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는 힘들이 잠재해 있어야한다. 그래야 어떤 사건과 마주쳤을 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바깥이 있기 때문에 아직 나의 사고나 행위속에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나로 환원되지 않는 힘들이 나에게 있다. 그때 나에게 어떤 사건에 맞닥뜨리면 사고와 관계를 변형시킬 수 있는 힘들이 생겨난다. 바깥이 현실화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건에 의해서 아직 현실화되지 않고 있던 내재적 힘들이 갑자기 폭발한다. 이런 개념은 니체의 ‘Unzent(때아닌 것)’ 아직 이 시대에 속하지 않은 것, 아직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는 것에서 가져왔다. 너무 때이르게 도착한 것. 반시대적 고찰, 니체에게서 중요한 것은 생성을 일으키는 사건들이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중심에 자리잡을 것인가? 아니면 생성속에 자리잡을 것인가? 이다. 늘 생성되어 있는 것을 중심으로 보면 역사가 연속적으로 보이게 된다. 그런데 생성, 사건에 자리를 잡고 보게 되면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지만 그 기존의 존재하던 배치를 바꿔낼 수 있는 전폭적인 힘을 내재한 사건들이다. 이 안에 자리잡고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역사를 볼 때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것을 사유할 것인가? 푸코나 들뢰즈는 어떻게 이 시대에 당연했던 게 다른 시대에는 당연해지지 않는가? 무엇이 일어난 것인가? 이 시대 잠재적인 힘이 어떤 생성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속에서 현실화된 것이다. 배치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배치는 역동적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떤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서 바뀌게 된다. 사회의 변화는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고요하다가 어떤 사건의 발생과 함께 갑자기 한꺼번에 힘들이 밖으로 분출된다. 이 시대의 구조, 배치자체를 역동적 방식으로 사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역동성이 없으면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와 지식은 자명하지 않다. 불연속을 강조하는 것은 내재해 있는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다.
고전주의 에피스테메는 마테시스, 탁시노미아, 발생이다. 단순한 사물들, 질서를 표현하는, 앎의 형태인 대수학 마테시스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계를 질서화 하는 것이 탁시노미아, 혼돈스러운 세계를 인간이 분류하려고 했다. 고전주의시대는 이성과 비이성을 명확하게 나누고 있으며 고전주의 시대 이성은 세상을 질서화 하는 것이다. 이 질서화는 동일성과 차이를 통해서 한다. 여기서 차이는 동일성을 비껴 나는 차이이다. 초상화를 그릴 때 닮은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모호하고 확실할 수 없다. 닮은 것이란 사람 사이에서 다른 것, 차이가 그 사람을 얘기해주는 것이다. 역사화에서도 중요한 것은 디테일한 것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차이를 얼마나 잘 표현하는 가가 화가의 능력이었다. 닮은 것 같지만 다른 것을 골라내는 것이다. 수학에서는 0.1이 적거나 많아도 다르게 인식한다.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수학이 앎의 모델이 된다. 발생은 인식의 발생을 말한다. 푸코는 어떤 것이 지속되다가 사라지는 것의 이유를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는 다양하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 이 사건의 여러가지 배치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현실화되었는가를 보는 것이다. 변화를 설명할 때 드러난 것 만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변화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를 사유한다는 것은 그 안에 있지 않은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유가 사유하려면 규정되어 있지 않은 바깥을 사유해야 한다. 배치의 변화를 사유하는 것이다.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절대적 앎은 없다. 니체의 테제인 진리라는 것은 없다. 그런데 그 시대 진리라고 말해지는 것들은 어떤 조건속에서 구성되는가? 모든 진리는 진리로 나타나는 동시에 그것이 진리가 아닌 잠정적일 수 있다는 속에서만 진리이다. 고전주의시대는 복잡한 세계를 질서 화하는 것이 앎이며 질서화는 동일성과 차이를 통해서 도표(타블로)로 만들어내려 했다. 현실속에서 발견한 것을 어떤 위치에 놓을 수 있는가 인식할 수 있는 것, 도표를 떠올릴 수 있는 게 지식이었다. 인식한다는 것이 식별 활동이었다. 그래서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를 표에다 배치할 수 있으면 인식하는 것이 된다. 이때 앎은 확실한 판단이므로 과학이 지식의 모델처럼 자리한다. 과학은 차이를 가장 예리하게 식별해내는 것이므로 역사적인 것과 겹치면 안 된다. 진실은 자명하고 분명한 지각속에서 마련되고 언어는 더 이상 사물을 대신할 수 없고 투명성과 중립성의 시대로 접어든다. 언어자체가 이세상의 질서를 명확하게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문법을 연구하는 것이고 질서정연한 사유의 전개인 일반이성문법이 중요했다. 인간의 이성적 사유를 나타나려면 언어의 차이를 말로 배치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인식 자체를 질서정연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게 이성이었다. 고전주의시대 본질적인 것은 해석이 아니라 질서이다. 그래서 17세기 자연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기호는 사물을 분류하기 위해 요청되는 분석의 수단이다. 기호는 이중적이다. 기호를 인식하려면 1) 무언가를 나타내야 한다. 행동하는 주체를 명확화 한다.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이것이 기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미 기호는 무엇을 표상하고 있으며, 기호를 가지고 이세계를 질서화 할 수 있다. 기호를 수단으로 사물들의 질서를 부여하고 모호하게 얽혀 있는 세계를 차이를 통해 분류하고 표에 배치해내는 것이 자연사이다. 시간성을 부여하지 않고 자연에 대해서 어떤 차이를 갖는지 분류해 내는 것이 지식이었다.
무엇을 중심으로 분류할 것인지를 분류의 기준을 이성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탁시노미아이며, 인간의 상상력, 감각적 인상들을 계열화, 질서화 할 수 있는 것이 인식이다. 고전주의 시대 에피스테메는 감각인상으로부터 모호하게 받은 것을 동일성과 차이로 분류해낼 수 있는 상상력을 통해서 인식이 드디어 작동하기 시작했다. 인식의 발생은 질서화 하려고 하는 의지에서 인식이 나온다. 비슷하게 보이지만 차이를 질서화 할 수 있는 지점에서 인식이 발생한다. 기호자체도 하나의 관념을 발생시키며, 인식의 발생에 중요한 것이 기호이다. 기호라는 관념을 갖는 게 인식의 기원이며, 관념을 엮어내는 게 인식이다.
17세기 자연철학의 시대라고 말한다. 갑자기 보이지 않던 것을 말하고 보는 문제가 아니라 자연철학이 주류였단 말도 아니고, 자연철학자가 많아졌다 거나 사람들이 이전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푸코의 관점으로 보면 그 시대의 앎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형식이 자연철학이었다는 것이다. 근대는 인간학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것은 지식의 대상과 구성하는 질문자체가 다르게 된 것이다. 학문의 핵심이 인간 자기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었다. 인간이라는 것이 처음 출현했다는 말이다. 이전 시대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바깥의 사유! 푸코가 생성 중인 것, 이행 중인 것으로서 역사를 보고 있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되겠네요. 꼼꼼한 후기 감사합니다!!
이렇게 정리해주신 덕에 복습하는 기분으로 찬찬히 잘 읽었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