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말과 사물』 1부 5장 ‘분류하기’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고, 3장 ‘재현하기’와 관련된 채운샘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우선 채운샘 특강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고전주의 시대 에피스테메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스피노자(1632~1677)는 『에티카』 3부에서 정서의 문제에 대한 고찰을 예고하며, 자신이 “인간의 행위 및 욕구를 마치 선과 면, 물체들의 문제인 것처럼 간주할 것”(『에티카』 3부 서문)이라고 말합니다. 스피노자는 정서와 욕망을 진지한 고찰의 대상으로 삼았고 인간의 인식 및 행위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아주 혁신적인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그러나 그가 정서와 욕망을 다루는 방식은 또한 17세기의 에피스테메에 부합하는 방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즉 스피노자는 인간의 정서를 기하학적 측정과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죠. 여기서 드러나듯 고전주의 시대의 앎의 모델은 바로 ‘수학’이었습니다.
앎의 모델이 수학이라는 것은, 개별 학문인 수학을 모든 영역에서 차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시대에 앎의 이미지가, 앎을 앎으로 만들어주는 규준들과 절차들이 수학을 참조하고 있다는 것이죠. 수학은 완벽한 질서와 정밀한 측정을 지향합니다. 채운샘이 말씀하셨듯 수학에서는 두 값이 0.001이라도 차이가 나면 다른 것으로 취급이 되죠. 이렇게 사물들 사이의 차이를 엄밀하게 측정하는 것, 동일성과 차이에 따라 대상들을 구별하는 것이 고전주의적 앎의 기본적인 형태입니다. 그림에 관한 예시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예를 들어 특정 장소, 특정 시기에 일어난 전투를 묘사하는 그림을 그린다면, 그 고장에서 그 계절에 자라는 꽃이나 자연물들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합니다. 시기, 사건, 장소, 인물 등을 ‘인식’하게 해주는 엄밀한 차이의 표지를 묘사하는 것이 회화의 임무였다는 거죠. 심상이나 아우라 같은 걸 담아내는 게 아니라 재현되는 대상을 다른 것들과 구별시켜주는 차이를 포착하고 그려내는 게 중요했다는 말입니다.
채운샘 강의를 듣고, 또 5장을 읽으며 고전주의 시대에 ‘차이’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5장에서 푸코는 기형과 화석에 대해 말하며, 이것들이 “탁시노미아에서 구조와 특징을 규정하는 차이와 동일성이 뒤쪽으로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235쪽)고 말합니다. 화석과 기형(돌연변이)이라고 하면 곧바로 ‘진화론’이 떠오르는데요. 17세기 자연사에서는 이것들이 충분히 주목을 받았으나 진화론적인 주제에 입각해서 그랬던 건 아니라고 합니다. 자연사에서 중요한 것은 전체 생물종들의 도표를 그리는 것입니다. 자연에 (완벽하게 가시적이지는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질서와 연속성을 귀납적이거나 연역적인 방식을 따라 재현하는 것. 중요한 것은 이 자연의 전체적인 질서이고, 각각의 생물들을 전체 질서 안에 자리잡도록 해주는 것이 앎의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기형과 화석은 생성과 변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상이한 종들 사이의 연속성을 확인시켜주는 중간항, 통로로 간주된 것입니다. 자연사에는 ‘역사’가 없습니다. 자연사에서 시간은 그에 선행하는 질서와 연속성을 펼쳐내거나 방해하는 외부적 요인으로 개입할 뿐입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앎은 차이를 강조합니다. 유사성에 대한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비판을 떠올려보면 이들에게 인식의 관건은 차이의 판별에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러나 이때의 차이란 전체 질서 속에서 그 항목들 사이의 측정 가능한 거리, 순서, 관계를 나타낼 따름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는 질서에 종속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한 생물종이 지닌 차이란 전체 질서 속에서 다른 종과 맺고 있는 관계를 나타냅니다. 개와 고양이의 차이를 인식한다는 것은 각각의 환원불가능한(동일한 척도로 평가할 수 없는) 고유성을 발견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반대로 그 둘을 동일한 질서 안의 서로 다른 자리에 위치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7세기부터 기호는 동일성과 차이에 따른 재현의 분석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지칭은 다른 모든 가능한 지칭과의 어떤 관계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하나의 개체에만 속하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분류 또는 다른 것들 전체를 분류할 가능성이 자기 앞에 있다는 것이다. 동일성과 이것의 표지는 남아 있는 차이에 의해 명시된다. 식물이나 동물에 새겨진 것으로 밝혀질 흔적에 의해 식물이나 동물이 지식되거나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식물이나 동물은 다른 것들의 모습이 아닌 것이고,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것의 경계에서만 스스로 존재한다.”(푸코, 『말과 사물』, 민음사, 218쪽)
“자연사에서 자연의 역사는 이해하기가 너무나 불가능하고, 도표와 연속이 구체화하는 인식론적 배치는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생성은 전체의 요구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중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생성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필연적인 변화를 위해서만 개입할 뿐이며, 생물과 무관하고 오직 외부에서 생물에 닥치는 일단의 혹독한 기후로 작용하든가, 끊임없이 희미하게 나타나지만 곧 중단되고 단지 소홀히 취급되는 도표의 가장자리에서만 감지할 수 있는 동향(動向)으로 작용하든가 할 뿐이다.”(푸코, 『말과 사물』, 민음사, 235쪽)
고전주의의 앎은 몹시 정밀하고 엄정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들을 보면서 고전주의의 사유가 자기의 틀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전주의의 사유는 질서, 틀, 도표로부터 빠져나가는 운동, 변이, 생성을 사유할 수 있는가? 사물들로부터 측정가능하고 비교가능한 것만을 재발견하는 식의 동어반복에 빠지지 않을까? 이런 (정리되지 않은) 의문이 드네요.
다음 시간에는 1부 6장 ‘교환하기’를 4번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소현샘께서 맡아주셨고요. 과제 출력은 훈샘과 후남샘이 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