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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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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마.침.내 푸코는 17세기~18세기 말, 채 200여 년이 안 되는 고전주의 시대의 독특한 지형을 빠르게 복습하고 그 너머의 시대로 갈 채비를 서두르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죠. 푸코의 책은 나선형 구조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뭔 말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시작해 한참을 헤매다 보면 뒤에 가서 그 주제를 다시 다른 말로 반복하죠. 그러면 다시 이해되지 않았던 앞의 말이 아, 그 뜻인가보다 하고 조금 감이 잡히는 방식, 어렵지만 끝까지 놓지 못하도록 하는 마력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 7장의 제목은 ‘재현의 한계’였습니다. 이 말을 ‘더 이상 재현을 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읽기보다는 ‘재현의 끝자락’, 혹은 ‘재현의 경계’ 정도의 의미로 읽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뭐, 쓰고 보니 거기서 거기인 의미 같기는 하나, 재현의 경계라고 이해할 때 한 시대가 말끔히 막을 내리고 다른 시대가 도래한다는 상식적인 관점을 벗어나는 것 같기 때문이죠. 고전주의 시대의 여러 웅성거림들 가운데 어떤 방식이 어떤 조건들 속에서 전과 다른 방식으로 솟아나게 되었나, 경계는 그런 힘들이 우글거리는 다이나믹함이 느껴지는 공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푸코는 이 경계의 지대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짚습니다. 먼저 어떻게 고전주의 질서가 역사의 시대로 넘어가고, 부의 분석이 정치경제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노동이 가치의 척도가 되고, 자연물들이 전체적인 질서의 도표 속에 자리매김 되던 것이 유기체로서 생물과 무생물로 분리되는가를 따라갑니다.
고전주의 시대는 재현의 시대였죠. 저는 여전히 ‘재현’, 특히 ‘주체 없는 재현’이라는 말이 소화가 되지 않습니다만, 푸코가 공들여 그 ‘주체 없는 재현의 시대’인 고전주의를 우리 앞에 재현하고 있는 그 이유가 뭘까를 곱씹습니다. 시종 ‘재현’의 시대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하는데, 먼저 든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선 고전주의의 질서는 훤히 펼쳐진 도표로 재현되었다는데, 이 말의 의미가 뭘까. 푸코는 이런 말을 하죠. “재현을 통해 혼란스럽고 동시적인 형태로 마련되는 것이 구조에 의해 분석되고, 따라서 언어의 단선적 전개에 적합하게 된다. 실제로 주시되는 대상에 대한 묘사의 관계는 명제가 표현하는 재현 요소들의 계열화에 대한 명제의 관계와 같다.”(206p) 이게 뭔 말인가, 뜯어본 끝에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이 시대 사람들이 실재, 그러니까 흐름 그 자체로 있는 사물 즉, ‘혼란스럽고 동시적인 형태로 마련되는 것’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런, 변화무쌍한 자연을 신의 창조와 같은 비이성적 영역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으로 가져와 보자는 기획이 이 시대의 기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앎이란 가시성의 영역의 자연물을 체계와 방법에 따라 분류하는데 그 분류의 질서와 말의 질서가 동일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언어의 논리를 잘 따라가는 것과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 동일한 차원이라니, 우리 시대의 앎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하나가 되었던 시대. “고전주의 시대에 담론의 기본 과업은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자 이 이름으로 사물의 존재를 명명하는 것이다. 두 세기 동안 서양의 담론은 존재론의 장소였다. 모든 재현의 존재 일반이 담론에 의해 명명될 때, 담론은 철학 즉 인식의 이론 겸 관념의 분석이었다. 담론이 각각의 재현된 사물에 합당한 이름을 부여하고, 잘 만들어진 언어의 망을 재현의 영역 전체에 배치할 때, 그때 담론은 과학이었다.”(189p)
“자연사가 가능해진 것은 인간이 더 분명히, 더 자세히 바라보기 때문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고전주의 시대는 가능한 적게 보려고 한 것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경험의 영역을 스스로 제한하려고 노력했다”(204P) 상식을 뒤집는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대 광학의 발전은 ‘경험의 영역을 제한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결과물이지, 우리가 단순 추론하듯 기저의 조건없이 우연히 광학이 발달했던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광학의 발달이라는 현상을 우리는 이중으로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가시성의 영역을 특권화하는 대신 다른 지각의 영역을 배제했다는 숨은 의미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죠. 저는 고전주의 시대 ‘경험의 영역을 스스로 재한하려는 노력’은 결국 ‘모든 존재물이 인식으로 다가오는 공간’(310p)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노력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왜냐, 존재물들을 도표에 배치함으로써 인식이 훤히 보여야했기 때문이죠. 제게는 이 시대 사람들이 인식에 바치는 노력이 마치 기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시대의 ‘지식’과는 얼마나 차원이 다른가를 느낍니다.
세미나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은 어디로 다 새버리고 안개 속에서 제 자신이 헤매는 이야기만 중언부언하고 있는 느낌입니다만 애써 기억을 되살려보겠습니다. 다음과 같은 푸코의 멋드러진 문장은 대체 얼마마한 지식이 압축된 문장일까요. “고전주의 시대에 형이상학은 정확히 큰 질서와 직은 질서, 동일성과 분류, 자연과 자연물, 요컨대 신의 오성 및 의지와 인간의 지각 사이에 자리하고, 19세기에 철학은 작은 역사와 큰 역사, 사건과 기원, 진화와 최초의 원천의 파열, 망각과 회귀 사이의 간격에 자리한다. 따라서 철학은 기억인 한에서만 형이상학이 되고, 필연적으로 사유에 역사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사유를 이끌게 된다.”(310p)
아이고, 어디 ‘말과 사물’ 참고서라도 있으면 들춰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푸코는 역사를 ‘구성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사실상의 연속들을 수집하는 활동’(309P)으로 오해하지 말라고 하죠. 흔히 역사라 하면 우리가 배운바, 기원이 있고 그 기원을 따라 연속적인 시대순으로 사건들이 나열되고 앞의 사건과 뒤의 사건은 이해가능한 인과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죠. 그리고 역사는 어떤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진보한다고 배웠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단선적인 시간을 전제로 구성되는 역사, 생각해보면 현존이 자신의 경험성을 이런 방식으로 조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푸코가 역사는 ‘경험성의 기본적인 존재 방식’이라고 했을 때 저는 그 의미를 우리가 우리의 삶의 스토리를 이런 방식으로 엮어나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고전주의 질서 속에서 그 시대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경험성을 조직했을까, 끝없이 상상하게 됩니다.
이 장에서 다룬 내용 중 ‘노동의 척도’도 어려웠습니다. 경제학 개념으로서 노동은 고전주의 시대 캉티용, 콩디야크에게서 이미 발견되므로, 애덤 스미스가 노동이라는 경제학 개념을 창안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노동의 의미를 약간 다르게 사용합니다. 그도 역시 노동의 개념을 교환가치의 척도로 이용하기는 하는데, 즉 교환 가능한 부를 분석하는 기능이 노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때 분석은 교환을 필요로 귀결시키기 위한 계기로서의 분석이 아닙니다. 부를 실질적으로 산출한 노동의 단위에 따라 분석하죠. 여전히 부는 재현의 요소로 작용하지만, 부가 결국 나타내는 것은 이제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노동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고전주의 시대 부는 사람들이 필요로 할 것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인데 이제 부를 나타내는 것이 노동이라는 뜻은, 노동이 상품화되었다는 것이겠지요? 결국 노동은 사람이 하는 활동인데 이 활동이 상품화되었다? 그러면 사람의 활동이 측정 가능한 것으로 환원되었다는 의미가 아닌가요? 헐!!! 애덤 스미스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지금 우리가 시간당 얼마의 활동을 당연히 여기고 있는 것이 이때를 연원으로 하고 있다는 건가요? 제가 이해한 것이 얼추 비슷하기는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푸코의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얼핏 이해될락말락하다가도 어느 지점에서는 모호하기도 해서 이 책은 절대로 혼자서는 읽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게는 세미나가 꼭 필요합니다. 샘들도 공감하실 거예요. 마지막으로 저는 이 문장으로 돌아갑니다.
“18세기 말의 어느 날, 퀴비에는 박물관의 표본병을 깨트린 후, 고전주의 시대가 표본병에 보존했던 동물의 모든 가시적 형태를 분석하게 된다. 라마르크라면 결코 감행하지 않았을 이 성상 파괴적 행위는, 관심도 용기도 인식될 가능성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비밀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의 결과가 아니다. 훨씬 더 엄정하게도 이 행위는 서양 문화의 자연 공간에서 일어난 변화이다. 투른포르, 린네, 뷔퐁, 아당송이 말한 의미, 또한 부아시에 드 소바주가 가시적인 것의 역사적 인식을 비가시적인 것, 감춰진 것, 그리고 원인의 철학적 인식에 맞세웠을 때의 의미로 이해된 역사의 종언이다. 그것은 또한 분류를 해부로, 구조를 유기체로, 가시적 특징을 내적 종속으로, 도표를 계열로 대체함으로써, 흑백으로 찍어낸 낡고 평면적인 동식물의 세계 속으로 역사라는 갱신된 이름을 부여받게 되는 심층적인 시간의 덩어리를 온전히 밀어 넣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의 시초가 된다.” (말과 사물 209p)
아, 박물관에 진열된 채 잠들어 있던 표본병을 깨뜨린 퀴비에의 행위를 푸코는‘성상 파괴’라는 다소 움찔한 표현을 씁니다. 이 행위가 은유하는 것은 무엇일까. ‘큰 질서와 작은 질서’의 조화로움이 깃든 광대한 하나의 우주가 깨지는 순간이라고 저는 상상해봅니다.
정말~~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후기네여!!! 샘 후기를 읽으며... 우리가 같은 곳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고전주의 시대를 '존재론과 인식론의 일치'라고 정리하신 부분 같은 몇몇 군데에서는 또 뿌연 안개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네요. 아무튼 제 근처 어딘가에서 절실히 헤매고 계신 샘의 후기를 읽으니 정말 든든합니다^^! (*애덤 스미스와 노동 이야기도 흥미롭네요. 어찌보면 노동(시간과 노고)을 척도로 가치를 분석한다는 것은 또한 인간의 노동 자체를 시간 단위로 분해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