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는 서양 현대철학의 사상적 과제를 아주 심플하고 명쾌하게 제시합니다. 망자들을 제대로 애도하는 것. 장례를 잘 치르기. 1차 세계대전은 유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1차 대전 이전에 유럽이 경험한 전쟁 가운데 최대의 전사자를 낳은 것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1789년부터 1804년까지 유럽 전체에서 40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1차 대전 직전의 보불전쟁의 전사자는 25만 명입니다. 그리고 불과 몇십년 뒤, 역사상 처음으로 전투기와 탱크, 독가스가 동원된 1차 세계대전은 1,300만 명의 전사자를 발생시킵니다.
우치다에 따르면 이때 유럽인들은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목도하고서, 전사자를 잘 떠나보내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생각해내지 못했고 결국 나폴레옹전쟁 때 유럽 각국이 했던 진혼 의식을 되풀이했습니다. 전사자를 ‘호국의 영령’으로 기린 것이지요. 거대한 위령탑과 기념비를 세우고 거기에 영령들을 제사지낸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이 ‘영령들의 뜻을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정서적인 동기를 부여해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불과 20년 사이에 또다시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1차 세계대전의 다섯 배에 이르는 전사자를 낸 것이지요.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지식인들은 심각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또다시 수많은 전사자들의 영을 떠나보내야만 하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1918년 때 방식으로 한다면 또다시 같은 재앙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니 그럴 수도 없습니다. 유럽문화가 계승해온 망자를 떠나보내는 전통적인 방법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것이지요. 기독교적인 유럽이 2천 년에 걸쳐 배양해온 진혼장송의 노하우는 이제 소용이 없어진 겁니다. 적어도 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만큼은 제대로 애도해서 전후의 세계에 재앙을 가져오지 않도록 진혼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것이 전후 유럽 지식인들이 맞닥뜨린 긴급한 정치적·사상적 과제였습니다.”(우치다 타츠루, 《소통하는 신체》, 민들레, 259쪽)
우치다에 따르면 라캉과 레비나스처럼 2차 세계대전 후 사상적 활동을 시작한 사람들은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유럽적 주체’에 의한 장례를 부인하게 됩니다. “당신들에게는 이제 상주를 맡길 수 없다. 이후의 장례는 우리가 맡겠다”고 나선 것이지요. 푸코 역시 2차대전 이후에 사상적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푸코 역시 ‘진혼’이라는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과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우치다는 하이데거 이후 새롭게 진혼의 과제를 짊어진 유럽의 지식인들이 더 이상 ‘망자의 소리가 들린다, 그들의 뜻을 받들자’라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망자의 소리가 들리지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라고 말하기 시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양차 대전이라는 사건을, 수많은 죽음들을, 유럽 문명이 낳은 파국을, 섣불리 ‘알 수 있다’고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들려오지만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타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씨름하는 것, 성급한 결론이나 상식적 자명성을 유예시키는 것. 우치다에 따르면 이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세대의 장례법입니다. 채운샘께서는 푸코의 작업이 근대적 자명성을 해체하는 것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는 진보한다거나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나아져왔고 나아질 것이며 나아져야 한다는 우리의 굳건한 믿음 같은 것 말이지요. 푸코는 이런 자명성을 그 근원에서부터 해체하기 위하여 우리의 익숙한 사고방식, 우리가 의식하지조차 못하는 전제가 신념과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불연속의 지점으로 내려갑니다.
《말과 사물》은 굉장히 딱딱한 문체로 쓰여져 있지만, 사실은 심금을 울리는(?) 진혼곡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치다의 관점을 갖고 와서 생각해보니 또 새롭게 보이네요. 푸코는 뭐 한다고 16세기까지 돌아가서 유럽의 지성사를 다시 써야 했을까요? 뭔가를 밝혀내고 싶었던 걸까요? 체계를 정립하고 싶었던 걸까요? 푸코의 관심은 자기 시대를 애도하는 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과 나치즘, 그리고 자본주의 하에서 제도화되고 있는 탐욕과 미시 파시즘들. 이것은 어떤 하나의 원인을 지목하여 그것을 제거하고 해결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 시대에 기후위기라는 현상이 하나의 원인을 지목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의 징후로 여겨지는 것처럼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푸코의 길은 해체인 것 같습니다. 단순히 특정 이념이나 이론을 논파하고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발 딛고 있는 자기 시대의 인식론적 지형 자체를 해부하는 것. 아마 푸코는 이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무언가 다른 길을 모색할 여지가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말과 사물》의 빡빡한 문장들 뒤에 감춰져 있는 ‘애도의 실천’을 읽어내 보면 어떨까요? 아직 ‘푸코의 애도란 이런 것이었다’라고 단언할 수도 없고, 여전히 감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이런 관점이 《말과 사물》이라는 텍스트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질문해보아야겠죠. 지금 우리 역시 애도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들려오는 망자의 소리는 어떤 것일까...?
딴소리로 가득한 후기였습니다^^; 공지하겠습니다. 다음주에는 《말과 사물》 8장 “노동, 생명, 언어”를 ~3번까지 읽어오시면 되고요. 과제는 지난시간과 동일합니다. 각자 충실하게 읽은 분량을 정리해서 숙제방에 올려주시고, 질문 3개를 준비해오세요. 간식은 후남샘, 과제 출력은 미영샘과 현정샘께서 맡아주시겠습니다!
딴소리 가득한 후기가 참으로 심금을 울리네요. ‘망자의 소리가 들리지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눈을 감고 대신 귀를 열고 타자의 못다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마음으로 <말과 사물>에 다가가는 것, 참고서를 찾을 게 아니라 그 마음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두가지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더군요.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는 순간과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느낄 때랍니다. 그 순간 강고했던 주체는 흔들리지요. 그래서 전쟁 후의 수많은 죽음과 그 영령들을 애도하려는 마음은 이 둘 사이에 계속해서 진동하고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주체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흔들리는 주체와 푸코의 사유에서 빠지지 않는 주체의 문제에 대해, 건화샘의 공지글을 읽으며 잠시 생각해봅니다.^^
역시 딴소리가 재밌네요... 고민하고 있는 키워드라 콕 꽂히기도 했구요.
애도자로서의 푸코. 푸코와 애도가 붙으니 애도라는 말의 용법도 새로워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