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세미나 후기(채운 샘 강의 정리)
우리는 정말 어렵게 『말과 사물』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전반적으로 다 어렵죠. 특별한 부분은 아주 특별하게 더 어렵습니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인데 다른 나라 말도 아니고 한글인데, 읽어도 모르겠는 답답함을 헤치고 같이 나가는 중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답답함과 어려움은 낯선 사유를 만나는 데 필연적인 과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 채운 샘 강의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쓸데없이 모조리 이해할 결심 따위 하지 말라고, 큰 그림만 이해하고 가면 된다 하시니 말입니다 ㅎㅎ
푸코가 『말과 사물』을 통해 던지는 문제의식은 무엇일까요? 우리 근대인이 인류이 역사에서 신봉하는 가치들인 성장·발전·진보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증거로 펼쳐 보이는 역사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주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푸코의 책을 활용하는 것은 해 보는 데 있으며 우리 가치와 생각들이 구성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암암리에 가지고 있는 전제들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 해 보기.
과거에 비해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나, 과거와 지금을 비교해서 단순하게 하나의 시간으로 보는 관점은 필연적 인과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여러 시간-예를 들면 아주 느린 지리의 시간, 보수성을 기본으로 가진 무의식의 시간, 엄청나게 빠른 테크놀로지의 시간과 정치적 시간-들이 아주 다양하게 함께 엉켜 흘러가는 것이 역사입니다. 다양한 가치와 여러 시간들이 섞여 함께 흘러가는 역사에서 어떤 힘들이 맞물려 있었고 부딪혔으며 어떤 가치가 최종 승리자가 되었는가를 보는 역사적 관점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한 시대의 자명성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기존에 생각하지 않았던 어떤 가치가 새롭게 솟아올라 진리값을 가지는 최종 승리자가 되는 불연속적 지점을 볼 수 있는 실천적 관점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런 사고가 가능하려면 먼저 우리의 가치 체계를 해체해야 합니다. 자기를 해체하는 방식, 정당화와는 다른 이해, 이는 나를 구성한 자명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불연속의 지대로 가서 자기의 행위를 직면하는 것이죠. 기존의 가치들을 해체하고 나서야 다시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으니 말입니다. 푸코를 읽는 데서 가지는 배움은 문장을 이해하는 것에 있지 않고 자기 해체를 실천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와의 관계를 만드는 힘 관계가 주체화인데, 『말과 사물』에는 나를 중심으로 볼 지점이 없이 너무 많은 지식이 펼쳐져 있기에 읽기가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는 말씀에 가슴 한켠의 답답함을 내려놓으며 책 내용에 대한 강의를 정리해 봅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부(유통되는 것에 대한 가치), 생명체(자연 속의 존재물인 실체들), 일반 문법(사고를 재현하는 언어의 규칙성과 사고를 표상하는 방식)을 지식의 대상으로 다룹니다. 나의 바깥에 있는 대상들이죠. 그런데 근대는 인간을 지식의 대상으로 다룹니다. 학문을 다루는 주체이자 학문의 대상이 인간인 것입니다. 인간 자신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죠. 근대의 인간은 인간에 대한 앎을 구성하면서 이를테면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해 정의내리면서 형성되어 온 것입니다. ‘나는 인간이야!’라는 말에 내포된 인간이 우월하다는 인간중심주의도 이러한 에피스테메에 기반합니다.
근대는 노동, 생명, 언어라는 에피스테메 위에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근대에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시간의 깊이(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방향성과 일정한 법칙성) 속에서 보게 됩니다.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인 부의 분석, 자연사, 일반 문법이 현재적인 동일성과 차이에 기반한 재현이 도표 위에 펼쳐졌던 것과 다르게 시간, 즉 역사가 더해진 내부의 의미를 보려 합니다. 예를 들어 근대 언어학은 보여지는 표면을 분석하는 고전주의 문법 체계 분석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 언어의 내면, 말하는 이의 심리와 정신세계, 말해지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비교하여 분석하는 것이죠.
강의를 정리하면서 푸코를 읽는 것은 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배치들, 자명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근저에서부터 의심하는 실천으로서요. 그럼에도 책을 읽으면서 무슨 뜻인지 모를 때 여전히 힘이 듭니다. 이전 사고의 틀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반증하는 것이겠지요. 그래도 또 힘을 내 봅니다.
이번 강의에서 4, 5, 6장을 정리해 주셨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아래에 정리하고 마무리합니다. 큰 그림을 이해하는 차원에서요.
<4.말하기>는 일반 문법에 대한 것인데 우리 글도 아니고 외국어이기에 더 이해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크게 설명하자면 고전주의 시대 일반 문법 분석은 드러난 문법을 분석하면 그것을 쓴 사람이 표상하고자 하는 바, 정신적 사고 과정을 투명하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언어학은 일반 문법이 하나의 표로 기능하고 그렇기에 일반 문법을 알면 그 사람의 사고를 다 알 수 있다고 여깁니다. 언어가 일반 문법이라는 표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비교:근대의 언어학에서 문법은 겉으로 드러난 형식일 뿐임. 언어 속에 내포된 의미, 지역적 차이에 따른 문화적 깊이를 알아야 한다고 여김, 언어를 대상화함. 비교 언어학, 기표와 기의, 언어의 의미론〕 그 표상 작용이 가진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법 체계는 4가지입니다. 속성(be 동사에 관한 것), 분절(단어가 다르면 내용이 다르다, 언어가 가지는 아주 기본적인 작용, 명사는 다 분절적), 지시(유럽어라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지시적 관계가 담고 있는 것이 행위)와 파생(어근의 굴절)이 그것입니다.
<5. 분류하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자연사와 구조를 아는 것입니다. 고전주의 시대 자연사는 사물을 가능한 한 정확한 언어로 표상하려고 하는 기획입니다. 가시적인 것을 얼마나 정확하게 명명할 것인가를 고민하여 그것을 하나의 표에 가시화할 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앎의 체계입니다. 따라서 동일성과 차이를 잘 분류하고 파악해야 합니다. 그렇게 표에 넣은 앎이기에 자연사는 가시성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시적인 것들을 제한하고 명명할 수 있게 해주는 전체적인 격자가 구조입니다. 생명체를 잘 구분하기 위해서는 동일성과 차이를 잘 구별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체계와 방법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에서 동일성과 차이를 찾아내는 것이 지식의 기반이었기에 인식론적 모델로 식물학이, 시각적 관찰을 위한 광학(렌즈)이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비교:근대는 생명으로서의 동물, 조직 간의 관계에서의 해부, 유기체의 작용에서의 위치와 연결, 내적 연결로서의 기능이 중요〕 자연사에는 시간성이 없습니다. 이때의 시간은 갑작스럽게 침입하는 사고(악천후)일 뿐 생명체에 내재된 시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자연은 그저 연속적으로 이어져 흘러가고 반복되는 것입니다. 고전주의 시대는 공간이, 근대에는 시간이 중요성을 가집니다.
<6, 교환하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화폐 자체가 중요한 것, 고귀한 것이었기에 모으면 되었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에 화폐는 자체로 가치가 있지 않고 다른 가치를 재현해 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화폐는 일종의 기호와 같이 순수한 표상입니다. 부의 분석은 사물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물의 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중농주의자들은 모든 가치의 근본을 땅으로 여깁니다. 땅으로부터 얻은 지대가 대단히 중요하고 마찬가지로 땅에서 결실을 얻은 잉여가 잘 흘러가도록 하는 유통이 중요합니다. 중상주의자(공리주의자)는 지금 나에게 없다는 결여가 가치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가치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르게 규정하기는 해도 이 둘은 가치의 창출에 인간이 있지 않습니다. 고전주의 부의 분석은 자본도 인간의 노동도 아닌 인간 바깥에서 만들어진 가치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다니며 어떻게 가치를 만드는가를 분석하는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에 탐욕이 없을 수 없습니다. 결여를 느끼고,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음에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의 부에는 무한 증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무한한 소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질적인 부는 펑펑 쓰고 사치로 남김없이 소진할 수 있을지라도 지금의 자본(실질적이지 않은)과 같은 무한 증식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문헌학, 생물학, 정치경제학은 일반 문법, 자연사, 부의 분석이 이전에 차지한 자리에서가 아니라, 이 지식들이 존재하지 않는 바로 거기에서, 이 지식들이 공백으로 남겨 놓은 공간에서, 이 지식들의 주요한 이론적 선분들을 갈라놓고 존재론적 연속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찬 깊은 틈에서 생겨난다. (『말과 사물』, 298쪽)
푸코를 읽는 것은 사건을 만드는 것이다~ 뭔가 느낌적인 느낌은 알겠는데 또 알쏭달쏭하네요. 사건은 누가 만드는 걸까요? 사건인 것과 사건이 아닌 것의 차이는 뭘까요? 질문을 남기는 후기도 좋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