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에는 『말과 사물』 8장 1~3번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8장 제목인 ‘노동, 생명, 언어’ 가운데 우선 노동과 생명에 해당하는 부분까지를 읽었는데요. 여기서 푸코는 정치경제학과 생물학에서 각각 근대적 에피스테메의 형성을 보여주는 두 학자로 리카도와 퀴비에에 대해 논합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리카도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푸코는 리카도에 의해 생겨난 결과를 세 가지로 설명하는데요. 그 중 하나는 희소성의 개념과 관련됩니다. 고전주의 시대에도 희소성이라는 개념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희소성이 필요와 관련하여 규정되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곡물이 희소성을 갖지만 사교계를 드나드는 부자에게는 다이아몬드가 희소성을 갖는다는 것”(357쪽)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소성은 토지의 다산성에 의해 대체로 보충됩니다. 그런데 리카도에 이르면 희소성은 인류가 마주하는 일반적인 현실이 됩니다.
“인류는 역사의 각 시기마다 죽음의 위협 아래에서만 일할 뿐이다. 가령 모든 주민은 새로운 재원(財源)을 찾아내지 않으면 소멸할 운명에 얽매여 있고, 역으로 인간은 수가 늘어남에 따라 더 많고 더 막연하고 더 어렵고 덜 직접적으로 생산적인 일을 시도한다.”(358쪽)
리카도에 따르면 경제학을 가능하고 필요하게 만드는 것은 “영구적이고 근본적인 결핍의 상황”(358쪽)입니다. 한편으로 인구는 제약이 없는 한 언제나 증가하는 경향을 띠며, 그에 비례하여 생필품을 얻는 것은 어려워집니다. 사람 수가 너무 많아져서 대지의 결실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게 된 시기에 비로소 노동의 필요성이 생겨났고, 경작과 더불어 인구가 증가하게 되면서 덜 비옥한 토지를 개간할 필요성이 생겼으며,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이 증대된다는 것입니다.
리카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생존투쟁입니다. 새로운 재원을 찾아내거나 생산양식을 개선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성장이 이뤄지지 않으면 인류의 몇몇은 굶어죽게 되겠죠. 희소성은 인간의 운명을 규정하는 보편적 조건입니다. 인구와 생산의 시간, 부단한 결핍의 역사. 리카도는 더 이상 생산이 결핍을 매울 수 없게 되는 시점, 그러니까 물품의 가격이 노동자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못 미치게 되는 한계의 지점이 오면 인구가 안정화되고, 희소성은 한도가 정해지고, 노동은 정확히 필요에 부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르크스는 이 관점을 그대로 차용하여 그 구도를 조금 바꿉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과 생산의 역사가 인간의 일반적 조건인 결핍에 대응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생산의 역사에 의해 결핍이 초래됩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노동의 생산물은 노동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빠져나가 축적”(363쪽)됩니다.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지급받는 것 이상의 가치를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데, 그러면 자본은 더 많은 노동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그렇게 자본이 점차 축적될수록 생산은 과잉되고, 결핍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납니다. 이러한 결핍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 소외의 현실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갖고 진실을 말하기 시작할 때에만 역사는 이전과는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합니다.
푸코는 리카도와 마르크스, 주류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가 동일한 인식론적 토대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둘 모두 “최종적인 발전의 여러 유토피아를 다시 소생”(365쪽)시키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이반 일리치가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일리치가 시종일관 비판했던 것이 바로 희소성에서 출발하여 유토피아주의로 귀결되는 이러한 근대적 사고방식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죠. 일리치는 우선 ‘결핍’을 인간을 규정하는 조건이자 인간 활동의 원동력으로 보는 산업화된 사고방식을 비판합니다.
“고고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호모 사피엔스의 성인 개체는 그 숫자가 모두 50억을 넘지 않는다. 그들은 라스코 동굴의 수렵도가 그려진 구석기 시대부터 피카소가 게르니카의 공포로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해 사이에 살았다. 만 세대에 걸쳐서 그들은 수천 가지가 넘는 다양한 생활 방식으로 살았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유어를 썼다. 그들은 눈 속에서도 살았는가 하면 가축을 기르면서도 살았다. 그들은 로마인과 무굴이었고 항해자와 유목민이었다. 하나하나의 생활 방식은 호미면 호미, 물레면 물레, 연장도 나무면 나무, 청동이면 청동, 철이면 철,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조건의 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든 사람답다는 것은 자신이 발을 디딘 구체적 시공간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필연의 규칙에 공동체의 차원에서 복종한다는 것을 뜻했다. 각각의 문화는 이 규칙을 서로 다른 관용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필연에 대한 각자의 생각은 죽은 사람을 묻는 데서건 푸닥거리를 하는 데서건 상이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문화의 이런 엄청난 다양성은 개인마다, 사회마다 다르게 경험하는 욕망과 갈망의 풍요성을 웅변한다. (...) 인류 조상의 절반이 우리가 요구needs라는 호칭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경험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이반 일리치, 『반자본 발전사전』 「6 요구」, 아카이브, 199쪽)
인용이 좀 길었네요^^. 어쨌든 핵심은 역사상 인류는 자신이 놓인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조건에 공동체적 차원으로 적응하여 저마다의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조건의 틀’을 만들어왔다는 겁니다. 가난과 결핍, 굶주림의 위협은 언제나 존재했을 테지만 그들이 속한 지리적이고 문화적인 배치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경험되었을 것이고(사람들은 눈 속에서도 살았고 사막에서도 살았습니다), 그러한 위협은 역사에 의해 종지부가 찍히거나 인간의 해방과 함께 해소되어야 할 외부적 한계라기보다는, 다양한 문화 속에서 ‘서로 다른 관용어’로 번역되어 남다른 삶의 양식들을 꽃피우는 계기였을 것입니다.
일리치라면 삶을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인간 욕망의 풍요성을 결핍에 대한 수동적 반응으로, 자연을 필요충족을 위한 자원으로 바라보는 리카도의 납작한 해석방식을 비판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핍의 해소로서의 인간 해방이라는 마르크스적 이상주의에 숨어 있는 산업주의적 사고방식을 지적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더 이상 ‘결핍’을 굶주림으로 경험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전히 아주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노출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결핍을 문제화하는 방식은 에너지 문제나 기후 위기와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환경 파괴와 자원 고갈. 여전히 우리는 기술의 진보(발전의 역사)가 최종장에 이르러 우리에게 무한한 풍요(고갈되지 않는 에너지!)를 가져다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말과 사물』 8장을 끝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후남샘, 과제 출력은 성연샘과 후남샘입니다(맞나요? 계속 바뀌어서 헷갈리네요^^. 틀렸다면 댓글로 정정해주시길!).
멋진 후기네요. 리카도와 마르크스가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통된 인식론적 토대 위에 있는지를 일리치의 기준에서 보니 선명하게 구분이 되네요. 말과 사물은 어렵지만 지적 욕망을 자극하는 매력덩어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장씩 읽으며 오래 씹는 맛이 일품입니다. 오늘 아침엔 앞 부분을 촤르륵 펼치다가 <연속과 파국>이 눈에 들어와서 읽으니, 전에 안 보이던 놀라운 풍경이 또 펼쳐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