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말과 사물』 2장 ‘세계의 산문’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한 단어로 말하자면 바로 ‘닮음’입니다. 유사성. 푸코가 파악하기로는 이것이 당시의 담론적 배치 속에서 ‘지식’을 출현시키는 원리가 되었지요. 우주는 보편적 부합의 장소로서 공간적 연쇄를 통해 사물들을 유사성으로 엮는 사슬을 형성합니다. 물속에 물고기들이 있는 만큼 대지 위에는 동물들이 있고, 물속과 대지의 표면에 있는 존재물들은 하늘에 있는 무수한 별들과 상응합니다. “식물은 생장의 측면에서 들짐승과 상응하고, 난폭한 동물은 감각의 측면에서 인간과 일치하며, 인간은 지능의 측면에서 별과 부합한다.”(포르타) 마치 원숭이 엉덩이에서 사과, 바나나, 기차, 비행기로 이어지는 동요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요^^;
물론 ‘닮음’은 부합만이 아니라 경합, 유비, 감응의 네 가지 원리 속에서 파악됩니다. 인식은 단순히 가시적인 유사성들을 그러모으는 유치한 놀이가 아니라 “방대한 책이 펼쳐진”(59쪽) 것과 같은 세계를 신중하게 읽어내는 작업입니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별의 관계는 대지에 대한 초목의 관계, 생물이 살고 있는 지구에 대한 생물의 관계 (……)”와 같습니다. 또 장미는 장례식에 사용되어 죽음과 인접했다는 사실만으로 향기를 들이마시는 모든 사람을 ‘슬프고 기력 없게’ 만드는 애도의 꽃에 됩니다. 지난 시간 쿠자누스와 파라켈수스에 대해 살펴보아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16세기의 우주는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접혀 들어가 있고 외부와 내부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거~~의 양자역학적이고도 프랙탈 구조를 닮아 있는(?) 우주입니다.
난희샘께서 질문을 하셨죠. 이런 의미의 앎이란 대체 어떤 앎이냐고. 저도 비슷한 질문을 품고 읽었습니다. ‘이게 앎일 수 있나?’ 앎이고자 한다면 자명한 근거나 증명이 뒷받침되어야 할 텐데, 바꽃의 씨앗이 눈과 닮아 있으므로 눈에 좋다고 하는 ‘지식’은 도대체 무엇을 입증한단 말인가. 물론 이런 의문은 시대의 상식을 무턱대고 들이댄 결과겠지요. 16세기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증명의 수단이나 인식의 도구들을 결여하고 있다기보다는, 지금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또 출현시키고 있습니다. 병을 대하는 파라켈수스의 태도에서 그런 것이 얼핏 드러납니다. 그에게 병이란 인간이 ‘열린 존재’임을 드러내는 징표인데, 이때 병은 자연적 운행을 방해하는 고립된 존재입니다.
상상해봅시다. 인간의 신체와 대사작용은 별들의 운행과 그에 따른 계절의 순환 안에 있으며 그것들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체의 일부분이 이러한 부합과 유비, 감응의 관계로부터 일탈할 때 그것이 곧 병의 징후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파라켈수스는 ‘병’을 제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순환’으로 용해하여 통합해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문제’를 파악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요? 고통, 질병, 가난, 죽음 등등 근대인들이 ‘제거’하고자 하는 것들을 이들은 자연적 운행과 순환의 한 국면 안에 통합하고자 하지 않았을지.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으로 접혀 들어가 있는 세계, 따라서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자리’를 갖고 있는 세계. ‘진보’를 숭배하는 근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의 세계가 아닐까요.
사실 2장에서 푸코가 가장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언어’의 문제입니다. 푸코는 16세기의 에피스테메에서 “닮음의 해석학과 표징의 기호학”(63쪽)이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물들 사이의 유사성을 표시해주는 기호, 표징은 그 역시 ‘닮음’에 의해 확보가 된다는 말입니다. “기호는 기호가 가리키는 것과 기호 사이에 닮음이 어느 정도 있는가에 따라”(62쪽) 무언가를 의미하게 됩니다. 말과 사물은 여러 층위에서 교차합니다. 마법과 박학의 예에서 보듯이, “텍스트에 대한 이해 방식은 사물에 대한 이해 방식과 동일”(68쪽)하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또 표지들의 망으로서의 세계에서 “각 형상은 다른 모든 형상에 대해 내용 또는 기호, 비밀 또는 증표의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언어는 세계 속에 자리하고 세계의 일부분을 이룬다”(70쪽)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언어는 사물들을 묘사하고 그리하여 인간들 사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재현적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신의 계시를 담고 있으며 다른 사물들과 유비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의 자연물이었지요.
그러니까 사물들은 일종의 텍스트이며 텍스트는 그 자체로 사물인 것입니다. 세계는 책이고 책은 세계입니다. 이로부터 “세계의 질서 자체를 말의 연쇄와 그 공간적 배치로 재구성하려는”(74쪽) 백과사전의 기획과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담론의 복원”(79쪽)을 임무로 갖는 무한한 주석 작업이 따라 나옵니다. 그러니까 당대의 사람들은 어떤 입증된 진실을 표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이야기들을 그러모으고 지식들을 공간적으로 배치하고 ‘본래의 담론’과 닮은 유사한 해석을 늘려나감으로써 언어 안에서 진실을 구현해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문자의 우위’는 의미심장합니다. 르네상스인들은 문자를 말의 뒤에 오는 것, 즉 말을 기록하기 위해 발명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말에 앞서는 하나의 사물로, 세계와 유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물질들의 덩어리로 보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보이는 것과 읽히는 것, 가시적인 것과 언술할 수 있는 것이 무한히 교차하는 균일한 지층”(81쪽)은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사라지게 된다고 합니다. 3장에서 확인하시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말과 사물』 3장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경혜샘, 후기는 현숙샘입니다. 과제 출력은 미영샘과 진아샘 차례이구요. 그럼 돌아오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