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말과 사물』 1부 3장 ‘재현하기’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고전주의 시대 에피스테메의 기본적인 원리를 다룬 챕터였는데요. 몹시 어려웠습니다. 이 어려움은 똘똘 뭉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설명해보고 함께 퍼즐을 맞춰가기 위해 으쌰으쌰 하는 느낌?
푸코에 따르면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의 핵심은 ‘탁시노미아 유니베르살리스’(보편분류법)입니다. 유사성은 이제 지식의 원리가 아니라 오류의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베이컨은 유사성을 ‘우상’, 즉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것 이상의 유사성을 사물들 안에 투사하는 인식의 착란이라고 비난합니다. 데카르트는 나아가 치수와 순서에 따른 비교로 사물들 사이의 부합, 경합, 유비, 감응을 발견해내는 것이 관건이었던 르네상스적 앎을 대체합니다. 이제 유사성은 아직 앎이 되지 않은 인상의 막연하고 유치한 덩어리일 뿐입니다. 닮음의 발견이 ‘앎’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분석’이 개입해야 합니다. 분석은 닮음을 매개로 미물로부터 우주전체로 자유롭게 도약해나가는 대신에, 수학적 원리에 따라 사물들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를 정연하게 측정하고 배치합니다.
기호는 인식 작용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실 기호가 아닌 것이 없었죠.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 접혀 들어가 있는 세계. 그 안에서 인식이란 인식에 앞서 존재하고 있는 기호들을 수집하는 것, 다시 말해 사물들 사이의 유사성의 관계들을 발견해내는 것을 뜻했습니다. 이제 기호는 재현합니다. 기호는 지시 대상에 속하거나 그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기원상 자연적이거나 관습적일 수 있으며, 그 자체로 확실하거나 단지 개연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수들이 말해주는 것은, 기호가 더 이상 사물들에 밀착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읽을 줄 아는 자를 위해 열려 있는 페이지와도 같았던 세계는 이제 없고, 판단하고 측정하는 이성의 작용에 의해 어떠어떠한 것들이 기호로 채택될 뿐입니다.
기호의 이원적 이론이 등장합니다.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의 이원적 체계. 기호는 더 이상 그 자체 물질성을 갖지 않으며, 의미되는 것과 의미하는 것을 연결해주는 닮음의 사슬도 끊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기호는 순수한 재현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기호가 이와 같은 순수한 이원성이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의미하는 요소는 무언가를 재현해야 한지만, 그렇게 되려면 의미하는 요소 안에 이 재현이 들어 있어야”(110쪽)하는 겁니다. 기호에 의해 의미되는 것과 기호의 관계가 소원할 수 있고, 기호의 내용에 대한 기호의 관계가 사물들 자체의 질서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기호는 ‘재현’이라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기호는 그 자체가 재현이 됨으로써 재현하기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머선 말일까요? 토론 중 다음의 구절을 실마리 삼아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포르루아얄의 논리』가 제시하는 기호의 기본적인 표본이 말도 소리도 상징도 아니라, 선이나 도형으로 된 공간상의 재현, 지도나 그림 같은 도안(圖案)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111쪽) 그러니까 기호는 의미되는 대상에 대한 투명한 재현이면서도 마치 지도나 그림처럼 기능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제가 읽어본 유일한 17세기 철학자인) 스피노자의 문체가 떠올랐습니다. 공리, 정의, 정리, 증명, 주석으로 이루어진 수학적이고도 건축적인 글쓰기. 『에티카』라는 책은 스피노자의 사유에 대한 재현이기도 하지만, 책에 배열되어 있는 기호들은 스피노자의 사유와 동일 외연을 갖습니다. 텍스트로부터 스피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추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제시되어 있는 공리와 정의와 정리를 엄밀하게 좇아가는 것으로 우리는 그의 사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푸코의 말을 되새겨봐야겠습니다.
“기호 바깥의 의미 또는 기호 이전의 의미는 없고, 사물의 본래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복원해야 할 사전(事前)의 담론은 암묵적으로도 현존하지 않는다. 이제는 의미 작용을 구성하는 행위도, 의식 내부의 기원도 없다. 기호와 기호의 내용 사이에 그야말로 어떤 매개 요소도 어떤 불투명성도 없다. 그러므로 기호는 기호의 내용을 지배할 수 있는 법칙 이외의 다른 법칙을 갖지 않는다. 기호의 분석은 동시에 그리고 당연히 비호가 의미하는 것의 해독이다. 역으로 의미되는 것의 해명은 의미되는 것을 가리키는 기호에 관한 성찰에 지나지 않게 된다. 16세기의 경우처럼 ‘기호학’과 ‘해석학’이 서로 겹친다. 그러나 이 겹침의 양상은 다르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이제 기호학과 해석학이 닮음이라는 제3의 요소 안에서 서로 합쳐지지 않고, 스스로를 재현하는 재현의 고유한 힘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푸코, 『말과 사물』, 민음사, 113쪽)
의미되는 내용에 대한 투명한 재현으로서의 기호. 이러한 기호의 이항체제 속에서 의미는 연쇄적으로 전개되는 기호들 전체와 동등한 것이 되며, 기호들의 완전한 도표로 주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동시에 기호들의 도표는 사물들의 이미지가 되고요. 자아, 요것이 뜻하는 바가 뭔지는 앞으로 일반 문법, 자연사, 부의 분석에 대한 푸코의 연구를 차례로 만나며 알아보도록 합시다!
다음 시간에는 『말과 사물』 4장 '말하기'의 1~4번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129~167쪽) 간식은 제가 맡았고요. 과제 출력은 설샘과 현숙샘 차례입니다. 그럼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동일성과 유사성의 역사가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사유역사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 놀라워요. 그러니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은 당연할 것이고요. 위에 쓰셨듯 이리저리 샘들과 퍼즐맞추듯 인식의 역사를 통해 우리자신을 만나는 방법이 즐겁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움의 괴로움과 동행하는 기쁨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