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물을 우리는 천천히 꼼꼼히 읽고 있습니다. 읽기도 어렵지만 (은주샘은 ‘말에 붙잡힌다’는 표현을 쓰셨지요. 공감합니다. 아, 언제 이 말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을지) 토론도 어렵습니다. 저는 지난 시간 토론 때 정말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마치 테이블이 무한히 넓어져 버린 실어증 환자가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확정하지 못하고 한없이 머뭇거리는 것처럼, 푸코의 <말과 사물>은 이런 신체성과 맞닥뜨리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때 저는 이해되지 않는 책은 책 그 자체의 문제지 저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굳이 이해되지 않는 책을 굳이 이해하기 위한 수고를 왜? 동일자(나는 나라는 정체성에 묶여있는)적 의식을 더욱더 강하게 하는 활동을 읽기라고 믿었던 데서 온 오류겠지요. 니체는 근대 교양인들의 읽기 방식에 대해 ‘독서 전반이 휴양의 일종’이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휴양으로서의 독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이해되지 않는 책은, 혹은 사람은, 어쩌면 동일자적 의식에 붙들려 있는 내가 너(책)를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와 맞물리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상식은 읽히는 것과 읽는 자의 분리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죠. 즉 읽히는 것은 그 자체의 완결된 의미를 함장하고 저기에 존재하고, 읽는 자는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인식능력을 미리 갖추고 있다는 전제 말입니다. 난해한 책을 앞에 두고 종종 우리가 절망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전제를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푸코는 고전주의 시대의 순수재현, 주체 없는 재현으로 평가합니다. ‘주체 없는 재현’이라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제가 이해한 바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표상, 인식의 활동, 즉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의 공간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푸코의 <말과 사물>을 만나는 경험은 그 책의 권위에 무릎을 꿇고 난해함을 난해함으로만 인상 짓고 넘길 차원이 아니라, 어떤 ‘지식의 무의식’이 독해를 가로막는 힘으로 작동하는가를 함께 사유해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재현의 공간에는 그 재현을 가능토록 하는 수많은 조건들이 개입됩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관객도 그 재현의 조건의 일부였듯이 푸코의 <말과 사물>을 읽는 우리도 그 책의 재현에 참여하는 일부입니다.
‘재현’! 재현이 참으로 난감한 개념인데요. 이 묵직한 돌덩이에도 불구하고 저는 ‘푸코의 숲’을 헤매면서 프레쉬한 피톤치드가 풍겨나오는 것 같은 느낌의 문장들을 만납니다. 가령 이런 문장이죠. 드러나는 것, 즉 재현이 “지시이자 동시에 출현이며, 대상에 대한 이해방식이자 자기발현이기도 하다”(111P) 지시이자 출현이라니, 이 문장의 의미는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므로 의식과 기호와 대상은 동시적이라는 말일까. 또는 보고자 하는 것이 보여지는 것이라는 의미일까, 머리가 어질어질 합니다. 아, 정말이지 ‘재현’이라는 개념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푸코에게, 특히 이 <말과 사물>에서 재현은 반드시 소화하고 넘어가야 할 개념 같은데, ‘재현’과 관련해 저는 내내 그걸 상상하고 또 상상해봤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게 아닐까요. 🌳라는 사물이 있습니다. 그것에 ‘나무’라는 기호를 붙입니다. 사물과 기호가 상응합니다. 다시 🌳과 유사한 것이 나타나면 그것이 이제는 ‘나무’라는 것을 인식합니다. 이제 다시 ‘나무’라는 기호와 동시에 🌳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사성을 벗어나는 사물들이 출현할 때 예컨대 ‘너도 밤나무’가 ‘나도 밤나무’라고 우길 때 더이상 지식의 구성 조건이 유사성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았을까요?
그리하여 17세기 고전주의 시대의 문턱에서 기호는 이제 세계의 형상이 아니며, 기호가 나타내는 것은 이제 닮음이나 친화력의 견고하고 은밀한 끈에 의해 기호와 연결되지도 않습니다.기호는 세 가지 변수에 의해 규정되는데, 첫째는 관계의 기원에 의해서 둘째는 관계의 유형에 의해서 셋째는 관계의 확실성에 의해서 기호의 실효성이 결정됩니다. 이제 기호는 오직 인식 행위에 의해서만 구성되고 기호가 참으로 기호이려면, 기호가 의미하는 것과 동시에 기호 역시 인식되어야 합니다.(105) 즉 “재현은 지시이자 동시에 출현이며, 대상에 대한 이해방식이자 자기발현이기도 하다”(111P) 혹은 “정신이 분석하기 때문에 기호가 출현한다. 정신이 기호를 사용하기 때문에 분석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의미와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요. 기호는 오직 인식 행위에 의해서만 구성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가 최초의 근대문학이라 평가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왜 고전주의 재현하기의 에피스테메에서 우스꽝스러운 광인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는지가 어렴풋이 짐작됩니다. 돈키호테는 유사성을 추구하는 인물이었죠. 이미 ‘자연과 책을 단일한 텍스트로 읽어 낸 박학이 공상으로 치부되고, 언어의 기호가 갖는 가치는 기호가 재현하는 것의 빈약한 허구’일 뿐인 시대, 그는 문자와 사물은 더 이상 유사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자와 사물 사이에서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니는 인물입니다. 16세기라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인물이 17세기 지식이 구성되는 공간에서는 ‘일탈자’요 ‘유비 속에서 이성을 잃은 인간’이요 ‘무질서한 닮음의 인간’으로 배제됩니다.
토론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죠. 푸코의 시대구분이 현행 역사적 구분과는 차이가 나는데, 이를테면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와 17세기에서 그 후 150여년 간을 고전주의로, 그 이후를 근대로 나누는데 왜 17세기 작품인 돈키호테가 어째서 근대적 문학인가? 아마도 푸코는 돈키호테의 행로와 ‘바깥’을 사유했던 근대의 문학의 행로가 유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에 따르면 근대 문학은 ‘상실된 유사성의 공백의 공간에서 말해지는 언어’ ‘문학 텍스트가 나날이 더듬는 것이 바로 이 공허하고 근본적인 공간의 행로’(83P)였으니까요. 이렇게 보면 푸코에게 시대적 구분은 다분히 논의를 진행하기 위한 잠정적인 구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할선을 긋고들 싶은가? 어쩌면 모든 경계는 끊임없이 변동하는 전체에서 제멋대로 생겨난 균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기를 구분하고들 싶은가? 그러나 두 지점 사이의 단일한 연속체를 출현시키기 위해 대칭적 단절을 두 시점에 설정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는 걸까?”(91p)라는 구절의 의미를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푸코는 이러한 잠정적 시대구분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요? 저는 토론 내내 의문점 내지는 안타까움으로 남아있었던 것이 ‘유사성’은 끝내 실종된 걸까? 였습니다. 유사성에 대해 베이컨은 ‘유사성이 우상’이라 비판했고 데카르트는 유사성을 ‘동일성과 차이, 크기와 순서의 견지에서 분석해야하는 불명료한 혼합물’이라 비판했지요. 따라서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가장 일반적인 배치의 측면에서 마테시스, 탁시노미아, 발생론적 분석이 맞물린 체계로 규정되고 이 과학들은 공통적으로 철저한 정돈의 기획을 지니고 있으며, 단순한 요소들과 이것들의 점진적 조합을 발견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결론적으로 17~18세기에 지식의 중심은 ‘도표’입니다.
저는 다음의 문장에서 ‘인간의 죽음’을 예고했던 푸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고전주의적 사유에 법칙을 부여하는 고고학적 망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인간은 인간의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재현의 얇은 돌출부에 자리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은 동일성들의 질서가 가시적이기 전에 닮음이 감지될 수 있게 하는 재현의 포착할 수 없는 혼란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다.”(120P) ‘합리주의’라 명명될 수 있는 질서와 기획의 망을 넘쳐흐르는 것. ‘도처에서 닮음과 닮음의 기호만을 보는 자들과 기존의 기호들 아래에서, 기존의 기호들에도 불구하고, 말이 사물의 보편적 닮음 속에서 반짝이던 시대를 상기시키는 더 근원적인 또 다른 담론을 듣는’ 자들을 배제하며 구축된 담론의 질서를 고전주의 시대로부터 감지한 것이 아닐까요.
푸코는 서양 세계가 해결하려고 분투했던 주제는 ‘생명은 운동일 뿐일까, 또는 자연은 신의 존재를 입증할 만큼 질서 정연할까 하는 문제’(126p) 였다면서 이 문제는 사실상 대두된 문제라기보다는 ‘서양 문화의 에피스테메가 무한한 범위의 기호와 닮음을 퍼뜨린 다음에, 인과성과 역사의 계열을 조직하기에 앞서, 도표 형태의 공간을 열어놓음으로서 발생한 문제’고 ‘서양문화의 에피스테메는 계산 가능한 질서의 형태로부터 가장 복잡한 재현의 분석까지 이 공간을 끊임없이 가로질렀다. 이러한 행로의 자취는 사상에 관한 주제, 논쟁, 문제, 산호의 역사적 표면에서 감지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문장에서도 ‘재현의 질서를 세우는 기호에 대한 재현의 완벽한 투명성’을 추구하는 서양문화의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적 의지를 느낍니다.
푸코는 다음을 예고합니다. “이제는 이 도표 형태의 공간이 가장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바로 거기에서, 다시 말하자면 언어, 분류, 화폐의 이론에서 이 공간의 분석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126)면서요. 우리는 푸코를 따라 4장에서 말하기, 5장에서 분류하기, 6장에서 교환하기를 차례로 분석하는 장으로 이동하게 되겠네요. 정말 말도 안 되게 머리를 쥐어짰던 후기를 이만 마쳐야겠습니다.
나무라는사물. 나무라는 기호. 너도 밤나무가 나도 밤나무라 우길 때, 더이상 지식의 구성요소로 유사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참 재밌네요. 웃음이 터져 나왔어요. 후기쓰느라 애 쓰쎴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에 대한 분석에서 정리해주신 재현을 내내 꽉쥐고 읽어야겠어요~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