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사물 6주차 후기>
이번 주는 채운샘이 강의를 해주셔서 그동안 어려워서 한참을 헤매고 있던 이러저러한 의문들이 해소되고 머릿속이 정리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채운샘의 강의를 그때는 들어서 알았으나 지금은 까먹는 일이 (되도록) 생기지 않도록, 후기를 통해 강의를 곱씹어 봤습니다.^^
채운샘의 강의를 시작하시기전 맨 처음 하신 말은 “고전시대의 에피스테메가 이해되었는가?" 였습니다. 그리고 샘들의 여러 질문들이 있었죠. ”기호라는 걸 이해가 안 되었다“, ”말과 언어가 같이 쓰이고 있는데 왜 굳이 구별해서 쓰고 있는가. 나는 같은 뜻이라 생각이 든다“, ”재현이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 앞에 드러난 것도 재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유사성이라는 시대에는 재현이 없는가?, 재현은 고전시대에만 해당되는 건가?“ 등이었습니다.
말과 글 중에 뜻을 잘 나타내주는 것은 뭘까요? ‘태초의 말씀이 있었다’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있는데, ‘신’이라는, 최초의 발화자로서 ‘말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해석되어져야하는 것’, ‘해석되기 전에는 순수한 것’, ‘그 말씀이 무엇인지 따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 즉 진리, 로고스(이성, 논리), 질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음성중심주의 혹은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하죠. 푸코는 이를 이성중심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푸코는 왜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연구를 하게 된 걸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 텍스트 속에서 무엇을 봐야하는 읽어내야 하는 걸까요? 일단 우리는 큰 그림을 봐야합니다. 푸코는 앎을 형성하는 그 시대의 가능성 혹은 조건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앎의 고고학’이라고 하죠. ‘앎의 고고학’이란 발견된 파편들을 가지고 어떻게 짜맬 수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즉 언표들(말해진 것) - 아카이브(도서관, 언젠가 쓰여진 것들, 한번 말해진 것, 파편과 같은 것들) - 이 파편적인 것들을 어떤 문서들과 어떻게 연결시키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어 질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어떤 것은 진리가 되고 어떤 것은 왜 안 되는지’, ‘앎을 구성하는 조건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등의 일정한 관점 속에서 계열화시키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고고학적 방식으로 어떤 앎을 추적했던 걸까요? 르네상스의 유사성과 고전주의 시대의 재현, 그 사이의 불연속을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 생각은 진보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 또한 그 불연속이 근대에 까지 맞닿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불연속을 과거로부터 추적해서, 근대는 앏 또한 어떤 조건들 속에서 구성하는지를 보려했던 것이 아닐까요? 즉 근대의 인간이 어떻게 앎의 대상으로 출현했는지를 말입니다. 정신분석학, 경제학, 언어학, 인류학 등의 인간 학문은 근대 이전에는 없었던 학문이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인간 학문의 출현이 왜 그렇게 되어졌는지를 과거로부터 질문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즉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 어떤 시대에는 보이던 것이 어떤 시대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런 불연속 - ‘인간 탄생과 죽음에 대한 분석이었습니다.’ 인간이 인간 세계의 어떻게 중심이 되었는가. 인간을 중심에 세우는, 세계가 대상이면서 인간 본인조차도 대상화시키는 근대의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제기였던 것입니다.
르네상스의 시대에는 세계 그 자체가 책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사물은 무엇입니까. ‘사물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물과 언어가 1:1 대응 관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소쉬르의 기호 이론에 나오는 기표, 기의의 관계처럼 자의적이거나 의미작용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기표가 기의로부터 미끄러진다.’라는 표현을 쓰죠. 근대에서는 그 말에 이러저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체의 의도, 주체의 내면, 그 시대의 역사성,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중들의 맥락 등을 다 포함하는 것을 언어라고 생각했죠. 예를 들어 선문답에서 부처가 ‘마세근’이라고 하면, 왜 ‘마세근’이라고 하셨을까 고민하며, 드러나지 않은 것을 해석하려고 하죠. 이런 ‘의미작용’, 푸코는 이것을 ‘두꺼워졌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롤랑바르트 같은 학자들은 이런 기호가 어떤 방식으로 이 사회에 작동하는가를 봤습니다. 이것을 (언어)구조학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르네상스의 시대는 끊임없이 닮음이 확장되는, 유사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언어는 그 자체로 신성함을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세상을 만들 때 어떤 위계와 분류에 따라 자기와 닮은 것으로부터 안 닮은 것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즉, 유사성의 발견은 신의 닮음을 찾는 것이고, 이 닮음과 연결시키는 것은 곧 질서정연함을 발견하는 과정이자, 지식이었습니다. 이 지식의 ‘박학’한 사람은 점성술사, 마법적인인 것, 뭔가 계시를 받는 경행을 띨 수밖에 없었죠. 반면 고전주의 시대는 과학의 시대입니다. 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분류표 속에서 새롭게 질서화 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 - 가장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까지 - 자기가 발견한 것을 인간의 만들어 놓은 분류표 어디에 놓을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인간의 분류표에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였던 것이지요. 예를 들어 자연사(어떤 생명체를 어디에 위치시키는가가 문제), 부의 분석 같은 학문이 그러했습니다. 또한 그렇게 분류표에 따라 앎을 질서 지우듯이 언어를 문법에 따라 질서 지웠습니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그런 식이었죠. 정의, 정리, 증명, 주석 등과 같은 문법에 따라 그대로 분석하면 쓰여진 것 자체가 그 의미와 생각을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쓰여진 것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 사유의 재현이었죠. 그 안에 정신분석학 같은 의미작용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습니다. 언어는 거울 같은 것이었고 투명했습니다. 이것을 ‘일반이성문법’이라고 합니다. 글의 질서가 이성적, 합리적 사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문법에 따라 쓰여진 앎이란 보편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쓰여진 것 자체가 담론이었습니다.
언어는 이렇게 투명하게 재현합니다. 반면 근대의 우리는 분열증을 경험하는 글쓰기죠. 우리의 인식과 글쓰기는 고전주의 시대의 인식과 달랐습니다.
이상 채운샘의 강의를 대략 정리해봤습니다. 처음에 개괄적으로 푸코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셔서 큰 맥락 안에서 <말과 사물>이 의도하는 바를 쫓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좀 더 뚜렷하게 텍스트들이 보여지는 것 같더라구요. 다음 시간에 마저 해주는 강의를 통해 그동안 읽었던 텍스트들이 더 이해되고 얻어가는 것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호 훈샘, 정리를 정말 잘 해주셨네요~ 채운샘 강의를 통해 뭔가 이해가 쏙쏙 되신 모양입니다ㅎㅎ 채운샘 강의 때는 알았으나 이후에는 헷갈리게 되어버리는 건... 필연적이지만 또 이렇게 한 번 정리하고 가는 게 큰 도움이지요~ 꼼꼼한 후기 감사함돠!!
훈샘의 꼼꼼한 정리, 아주 조금의 훈샘 나름의 부연설명까지 아주 감사히 읽었습니다. 정리가 만만찮았을 텐데 ᆢ아마 녹음파일을 수십번 정지 리플레이를 하셨을 것 같아요. 이렇게 함께 밀고나가니 그나마 말과 사물이 쬐금씩 나아가는 것 같기도 하네요. 수고많으셨어요^^
일반이성문법 말자체도 어렵고 이해가 어려웠는데 이제 좀 투명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