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말과 사물』 4장 뒷부분에 관해 짧게 세미나를 하고 채운샘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 내용은 훈샘이 정리를 잘 해주셔서 저는 간단히 제 기억에 남은 부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은 ‘근대’라는 말이 훅 들어왔습니다. 푸코의 ‘방법’은 앎의 고고학으로, 인식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말해진 것들(과거를 다루고 있으므로 결국은 기록되고 씌어진 것들)을 실증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역사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언표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푸코식의 고고학은 일반적인 역사학과 구별됩니다.
푸코의 주안점은 언표들로 하여금 다시 말하게 하는 것, 씌어진 것을 통과하여 잊혀진 과거를 복원하는 일에 있지 않습니다. 언표들을 일정한 관점 속에서 ‘계열화’하는 것, 그리하여 ‘불연속’을 드러내는 것이 고고학적 작업인데요. 4장 뒷부분에서 푸코가 말하듯, 그는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지식들의 ‘내용’을 확인하고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 것들로부터 말해지지 않고 있는 것을, 그것이 그렇게 말해질 수 있었던 어떤 절차들과 규칙들을 추출해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문헌들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러한 작업을 관통하는 해석의지를 놓고 본다면 푸코의 고고학은 전통적 역사학과, 아니 거의 대부분의 역사학적 작업들과 궤를 달리 합니다. 푸코는 ‘우리 근대인들은 앎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라는 질문을 품은 채로 앎‘들’의 역사, 진리‘들’의 역사를 기술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것도 앎과 진리의 변천사를 다루는 방식, 그러니까 상이한 시공간에서 진리나 지식이라고 불리던 것들의 내용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진리가 진리로 출현할 수 있었던 조건, 사유가 진리와 맺고 있던 관계의 형식 같은 것들을 전방위적으로, 날카로운 눈으로 살핀 것이죠.
이러한 작업은 결국 ‘어떻게 다르게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의해 추동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똑같은 전제들, 똑같은 문제화의 방식들에 의존한 채로 결론만 바꾸는 반응적인 방식이 아니라 생각한다는 것의 모델 자체를 바꾸는 것이 문제일 때, 푸코는 자기 극복의 계기로 역사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고다르는 (아마도 그 책을 대충 읽고서) 『말과 사물』이 특정한 시대에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과 생각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관념적이고 오만한 책이라고 평했습니다. 확실히 푸코가 인식가능성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르네상스, 고전주의, 근대라는 커다란 분절 하에 이러저러한 도식들을 들이밀고 있으니 그렇게 보여질만도 하지요. 저도 푸코 평전을 통해 고다르의 악평을 접하고 내심 의문이었습니다. 푸코는 어찌 이리도 공들여 과거에 대해 말하는 걸까? 푸코는 과거를 복원하고자 하는가?
그치만 채운샘의 강의를 듣고 다시 상기할 수 있었던 것은 푸코가 항상 복수적 앎들의 해방을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푸코가 고고학적 작업에 공을 들였던 것은 과거에 대해 단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고안하고, 지식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된 목소리들을 분기시키기 위한 것이었겠죠. 솔직히 지금은 채운샘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니 그런가보다 하는 수준이지만(^^;), 일단 이를 동아줄 삼아 어려운 『말과 사물』로부터 푸코의 해석의지를 이끌어내보도록 해야겠습니다.
다음주에는 『말과 사물』 5장 ‘분류하기’를 1~4까지 읽고 과제 작성해주심 됩니다. 과제 출력은 미현샘, 은주샘이십니다. 3시부터 1시간동안 4장 ‘말하기’에 관한 채운샘 강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