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말과 사물』 5장 ‘분류하기’ 1~4번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푸코는 ‘역사가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5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푸코의 비판은 이들의 뚜렷한 목적론적 관점을 공격합니다. 사상사가들은 17세기의 자연사로부터 근대적 생물학의 전조를 보고자 합니다. 현미경이 발명되고 물리학에 특권이 부여되며, 데카르트 기계론이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중세적 미신으로부터 벗어나 점차 과학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 푸코는 말합니다. 역사가들은 “그때에는 생물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150여 년 전부터 우리에게 친숙한 지식의 분할이 그 이전의 시대에는 유효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생물학이 미지의 분야인 것은 매우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 즉 생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195쪽)라고.
푸코에 따르면 역사가들에게 새로운 생명과학과 그것의 탄생을 둘러싼 “중대한 논쟁들을 재구성하는 것”(193쪽)은 손쉬운 일입니다. 태동하는 중의 생명과학의 내부를 보자면 생기론과 기계론이 맞서고 있고, 생물의 분류가능성을 두고 린네와 뷔퐁이 논쟁을 벌입니다. 한편 생명과학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과학과 신학 사이의 갈등, 천문학, 역학, 광학의 낡은 틀에 얽매이는 전통적 과학과 생명의 영역 자체 내에서 특수한 내용을 감지하기 시작한 신진과학 사이의 모순, 자연의 부동성을 주장한 사람들과 자연의 창조력을 주장한 사람들 사이의 대립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정리하는 것은 푸코의 방식이 아니죠. 푸코는 물론 개별 학문이나 학파, 사상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그 고유의 실체적인 기원이나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는 반대할 것 같습니다. 이를 진리나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연속적인 과정 안에 있는 여러 국면들이나 양태들로 여기는 관점에도 반대할 테고요.
지난 시간에는 생기론과 기계론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푸코는 고전주의 시대 자연사를 둘러싼 사상적 지형도를, 혹은 그에 관한 역사가들의 상식적 재현을 가벼운 터치로 훑고 지나가는데요. 서양 지성사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저로서도 따라가기가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생기론과 기계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막상 설명하자면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조사를 좀 해봤는데요. 일단 기계론은 데카르트에 의해 제안된 관점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하고 있던 고-중세 자연학과 단절하는 이론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체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물체를 ‘비활성’이라고 규정합니다. 물체가 비활성이라는 것은 “물체 속에 스스로 운동하는 원인이 없다는 뜻”(김성환, 『17세기 자연철학』, 그린비, 24쪽)입니다. 개개의 물체들은 그 고유한 성질이나 내부적 동력을 지니지 않습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물체는 비활성이며 그 본성은 연장, 즉 공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비활성의 연장―모양, 크기, 운동으로 환원된 물체에 대한 관념은 자연 철학에서 기하학적 추론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생기론이란 무엇일까요? 기계론이 데카르트라는 뚜렷한 기원을 지니고 있는 것에 반해 생기론은 푸코가 언급하듯 몽펠리에의 보르되와 바르테즈, 독일의 블루멘바흐, 파리의 디드로와 비샤 등 다양하고 상이한 주창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바르테즈의 생기론에 관한 논문을 살짝 찾아보았는데요. 중요한 건 생기론이 애니미즘과는 다르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애니미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물이 살아있고, 모든 자연 현상은 의식적인 의도에 해 일어난다는 믿음”인데, 바르테즈의 경우에 생기론이란 이러한 범신론적 함의를 갖지 않으며 “물리·화학의 원인과 구별되고, 그 작용이 기계론적으로 설명되기 힘들며, 그 속성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두 가지 고유한 원리”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사유하는 영혼’의 존재로서, 의식적으로 인위적인 조절이 가능한 생리적 기능에 대한 가설적 원인입니다. 가령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의 신체적 운동을 조절할 수 있으므로 기계론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유하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잠정적·가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겠죠. 다른 하나는 ‘생기적 원리’입니다. 바르테즈는 “특수한 물리화학적 법칙에 의해 자동적으로 통제되는 생명 현상의 원리”를 지시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했는데요. 예를 들어 우리 몸의 여러 부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고 하나의 장기에 가해진 원인은 다른 장기로 이동하며 작용한다는 것이 사실이므로 “생명의 기능 모두를 총체적으로 관장하는 단일한 원리가 존재해야”(한희진, 「폴‐조제프 바르테즈(1734∼1806)의 생기론」)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기적 원리는 각 생명체들의 생존과 고유한 개체성의 보존을 가능하게 합니다.
자, 어쨌든 푸코의 관심은 논쟁을 복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대립, 갈등, 모순, 논쟁의 조건(동일한 토대)을 살피는 게 중요하겠죠.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관찰이 형식이 다듬어진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자연사가, 직접 눈으로 보고 조사한다는 의미에서 고대적인 ‘역사’가 부활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관찰, 자료, 이야기를 구분하지 않았던 르네상스 시대와 비교해보면 새로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사의 성립은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더 많은 것을 관찰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걸까요? 푸코는 사실상 그 반대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고전주의는 “경험의 영역을 스스로 제한하려고 노력”(202쪽)했습니다. 경험과 관찰의 영역은 ‘배제’를 통해 확립됩니다. 일단 소문을 배제해야하고, 취향과 입맛 같은 가변적인 요소들은 최대한 배제해야 합니다. 명증성과 넓이의 감각인 시각, 그리고 모든 이에 의해 인정될 수 있는 부분별 분석만이 절대적으로 중시됩니다. 시각 중에서도 색깔 같은 주관적이며 유용한 비교의 근거가 되지 못하는 요소들 또한 배제됩니다. 우리의 풍부한 감각경험을 앙상하게 깎아낸 결과 “선, 표면, 형태, 부피”(202쪽)라는 자연사의 관찰 대상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죠. 인식 가능성의 조건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지식과 관계하는 감각과 그 형식이 결정된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우리 시대에 특권화되어 있는 감각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물론 여전히 ‘시각’이겠지만 지식과 관계하는 것은 선, 표면, 형태, 부피를 관찰하는 시선은 아닐 것 같네요.
다음주에는 『말과 사물』 5장을 끝까지 읽고 정리과제를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과제 출력은 성희샘과 새벽샘께서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뵐게요~
새로운 앎의 탄생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수많은 논쟁, 모순, 대립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푸코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는 거!
후기에도 썼던 내용인데 건화샘의 공지에서도 읽게 되니 이것만은 머리에 남겠네요~^^
한 발 한 발 가볼게요 ㅎㅎ
우리의 풍부한 경험 감각을 앙상하게 깍아 낸 결과, 우리의 인식 가능 조건이 달라지고, 그 과정 안에서 지식과 관계하는 우리의 감각과 형식이 결정된다니......앙상한 우리의 지식이, 우리의 삶이...ㅉㅉ...그러네요...푸코를 읽으면 앙상한 경험감각도 삶도 풍부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