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건화반장님이 두 조로 나누어 세미나를 해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1시간 반 정도 각 조가 토론을 한 후, 다시 모여 약 50분가량 종합하면서 마무리했답니다. 읽었지만 잡히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내용을 뭐라도 말해보자는 심정으로 토론을 했던 것 같네요. 이번 후기는 세미나 시간에 나온 질문을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조는 현정샘의 생기론에 대한 첫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이 말하고자 하는 생명과학은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인해 “기계론”적이었는데 새로운 방향의 ‘정신’을 생명과학 논거의 목록에 끼워 넣었습니다. 이 새로운 방향의 정신이 “생기론”이라 표명되었을 텐데 이 생기론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 질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여기에서는 기계론과 생기론의 대립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잘은 모르겠지만, 푸코는 대립의 관점은 무의미하다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데카르트의 기계론이 위축되면서 자연의 역사가 출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느끼며, 그렇게 말하곤 한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이 결국 세계 전체를 직선적인 운동의 법칙에 들어맞게 할 수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을 때,……자연의 기이한 풍요로움을 드러냈을 것이 틀림없고, 생물의 세심한 관찰은 데카르트 철학이 막 물러나 빈 자리에서 시작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어떤 과학이 다른 과학에서 탄생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어떤 과학도 결코 다른 과학의 부재에 의해서나 또 다른 과학의 실패, 심지어는 또 다른 과학이 마주친 장애로부터 탄생할 수 없다.”(195-196쪽)
그러니까 자연사는 데카르트 철학의 좌절이 아니라 데카르트 철학(기계론)과 생기론은 동시대적이고 동일한 에피스테메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에서 근본적인 것은 기계론의 성공이나 실패, 자연에 대한 수학적 설명의 권리나 불가능성이 아니”(99-100쪽)라고 말합니다. 그럼 무엇이냐? “18세기 말엽까지 변함없이 지속되는 마테시스에 대한 이해 방식”(100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계속 마테시스와 탁시노미아를 연결짓기도 했는데요, 사실 마테시스, 발생, 탁시노미아도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뜬구름 잡는 얘기를 한 것 같기도 하네요.^^;;
두번째 질문은 훈샘이 해주셨는데요, 푸코의 역사 인식 방법에서 불연속의 개념이 중요한데 정확히 이해가 안 된다는 애기가 나왔는데요, 훈샘은 불연속이라는 것이 완전한 단절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사성의 범위가 광범위해지면서 질서를 지어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면서 재현이 등장했고, 재현이라는 것은 르네상스에 없었던 것이 아니고 고전주의 시대에서 두드러진 것이 아닌가? 이게 불연속이 아닌가? 라는 얘기를 하셨는데요, 저희 조원들이 르네상스가 이랬기 때문에 고전주의에 요런 것이 등장했을 거라는 인과를 벗어나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뭔가 찜찜함이 남더라구요. 저희도 아리까리해서 말이죠. ㅎㅎ
그래서 함께 모였을 때 다시 얘기가 되었습니다. 건화샘은 불연속이냐, 연속이냐가 핵심은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연속이 불변항을 가정하고 진리, 자연, 생명이라는 불변항이 점점 진보해왔다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16세기의 존재들은 17세기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 속에서 무엇가가 출현하기도 할 테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앎이라고 불리는 배치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 중요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과관계가 완전히 단절된다는 불연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했던 것들이 앎의 항과 대상들이 다르게 계열화하면서 새롭게 솟아오르는 것을 불연속으로 보아야 한다는 걸로 불연속을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건화샘 조에서는 자연사가 어떻게 역사라고 불리는지에 대한 의문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시간의 연속성이 없는 것을 어떻게 역사라고 할 수 있나라고 생각했지만,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의 역사처럼 직접 조사하고 관찰을 기반으로 하는 앎의 구성을 역사라고 불렀던 시기로 정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연사에서 경험의 영역을 스스로 제한하려고 노력했다는 내용으로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고 합니다. 알드로반디의 경우는 엄격한 위계 없이 중첩되는 모든 것들을 앎이라고 했었는데 이젠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가시적인 대상을 관찰하고 조사하는 것이 앎이 되었고, 고전주의 시대는 앎이 더 명확해지고 엄격해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자연사에서는 관찰에 힘을 발휘하게 되는 가시성으로 인해 다른 감각은 배제된다는 사실에는 우리 모두 흥미로워했습니다. “현미경은 기본적 가시성의 영역을 넘어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적 가시성의 영역에서 제기된 문제의 하나, 즉 가시적인 형태가 어떻게 세대의 흐름을 거슬러 유지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었다”(203쪽)는 이야기가 난희샘은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으로 모든 자연물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과 차이를 규정하는 방식인 체계와 방법은 어떻게 다른가였습니다. 217쪽에서 체계는 등위 관계만을 알아 볼 수 있고, 방법은 종속관계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많은 얘기를 하긴 했는데 풀지 못하고 마무리가 되었네요.
제가 세미나에서 나온 샘들의 얘기도 소화 못하고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생태에서 후기를 쓰려니 세미나에서 나왔던 얘기를 옮기는 수준에 머무르게 되었네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하며 마무리 합니다~! 전 그만 총총총...
토론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해주셨네요~ 그런데 "고전주의 시대는 앎이 더 명확해지고 엄격해진 것 같다"기보다는 고전주의 시대가 되면 '앎'과 '앎이 아닌 것'의 경계가 더욱 첨예해진 것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ㅎㅎ
토론 내용이 아리까리하다면서 총총총 잘도 정리했네요. 정리 복사한 사람인 저도 계속 뜬 구름잡다온 것 같아 뭔가 미적찌근했는데, 그래도 총총총한 글을 읽으니 그래도 우리가 이랬구나 하면서 쪼끔 이해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