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칸트는 인식을 인간 자신의 능력 안에 정초시키고자 했습니다. 이제 인간의 인식은 객관 세계의 단순한 투영도 아니고, 이데아를 상기하는 일도 아니고, 그 자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 됩니다. 인간은 경험적 질료들을 인식주관(시공간과 범주)을 통해 다듬어 인식 가능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자신의 감상세계 안에 들어온 것들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신’이나 ‘물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칸트는 인간의 인식에 제약을 가한 셈이죠.
그런데 다른 한편 이것은 인간의 인식에 자유를 부여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물들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비교하고 종합하고 판단하고 파악하고 해석하는 인간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어떤 선험적인 능력들 덕분이니까요. ‘신’ 또는 ‘아버지’ 없이도 우리들은 자율적으로 경험을 종합하고 세계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또 인간이 선을 실행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신의 존재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당위 설정 능력으로서의 선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계몽을 “사람이 자기 탓인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남”이라고 정의하면서 “감히 알려고 하라”라고 말한 것에도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깔려 있었겠죠.
이번 주에는 『판단력 비판』에 대한 해설을 함께 읽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칸트는 ‘미적 판단’에도 선험적 원리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쾌감을 수반한 인식작용 역시 순전히 경험적이며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덧없는 감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종종 아무런 직접적 감관의 자극이 없는데도, 운치 있는 경관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커다란 쾌감을 느끼곤 합니다. 감각적 욕구의 충족과 관련 없는 이러한 미적 쾌감, 칸트는 이것이 자유로운 상상력과 합법칙적인 지성의 합치로부터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상상력의 형상화 작용이 보편적인 지성의 규칙과 일치할 때, 그러한 앙상블에서 쾌감이 생겨난다는 것. 그런데 저는 칸트가 취미판단을 적극적인 능력으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다시금 ‘합목적성’에 종속시켜버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는 결국 우리의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가치평가가 진리의 외피를 쓴 합리성에 종속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요. 모든 인식작용이 곧 취미판단에 다름 아니라고 했던 니체에 비하자면 훨씬 보수적이라는 느낌이네요(^^).
이번 주에는 피에르 테브나즈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후설에 관한 부분도 읽었는데요. 저는 후설이 칸트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후설은 학문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자의 의식의 지향성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학문은 “그 현실적 결과가 언제나 근사치적이고 불완전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향성 안에서 절대적 대상성을 향하는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34쪽)는 것인데, 일단 학문의 결과나 내용을 멀리 치워놓았으니 후설은 ‘지향성’이라는 것을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식을 인식의 토대로 세우자면, 그것을 주관적 표상으로 환원해서도 안 되고 객관 세계의 투영으로 보아도 안 됩니다. 후설은 “판단하고, 확증하고, 꿈을 꾸고, 살아갈 때 (...) 우리가 정신에서 가지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은 무엇인가?”(35쪽)라고 질문합니다.
의식을 토대로 삼기 위해서, 학문을 의식 위에 정초하기 위하여 후설은 ‘현상 대 물 자체’라는 칸트적 구분을 넘어설 필요가 있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물 자체가 따로 있고 인간의 의식에 들어오는 것이 단지 인간의 감관에 의해 포착되고 인식주관에 의해 다듬어진 감각적 소여일 뿐이라면 ‘의식의 지향성’을 인식의 토대로 삼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진리의 규준(척도?)은 의식 바깥의 실재의 편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겠죠. 그래서 후설은 ‘현상’이라는 칸트의 개념을 새로운 맥락 속에서 전유합니다. 후설에게 “현상은 의식 안에서 그 자신을 직접적으로 현시하는 것”(36쪽)입니다. 대상의 실재성이나 비실재성은 과감하게 괄호 쳐버리고, 의식에 직접적으로 현시된 현상으로서의 세계에 집중하자. 뭐 이런 게 아닐까요? (너무 거친 정리인 것 같기는 합니다ㅠㅠ)
저는 인상주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네, 다분히 책 표지에 프린트 되어 있는 모네의 루앙 대성당 때문입니다. 인상주의 회화는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감각을 묘사하는 것에 집중하지요. 여기에도 사물이라는 것이 일정한 꼴을 가지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과 의식에 스스로를 현시함으로써 특정한 인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세계가 “의식에 내재하는 실재성 안에서 나타나는 사실과 관계”(39쪽)한다고 주장한 후설의 철학과 유사한 지점이 있지요. 아마도 후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는 언어나 관습에 의해 경직된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지만, 우리의 의식을 더 파고들어가보면 거기에는 ‘현상’이라는 ‘실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말과 사물』에서 푸코의 ‘고고학적’ 논증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는다. (1) 지식의 조건들은, ‘나는 생각한다’로부터 추론되지 않는 만큼이나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반성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지식의 조건들은 익명적 담론의 총체가 출현하고 변화하는 가운데 발견된다. (2) 이 조건들은 역사적으로 우연하기 때문에 그것들에 철학적 ‘토대’나 ‘기반’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3) 토대론적 반성의 대상으로서의 ‘유한한 실존’으로 돌아서는 것은 사실, 우리에 대한 지식에서 등장하는 방식 내에서, ‘보다 단조로운’ 역사적 변화에 의해 가능해진다. (4) 우리의 유한한 실존에 대한 토대론적 분석은 이렇듯, 포스트칸트적 사유의 근본 문제, 즉 ‘선험적-경험적’ 이중화의 문제나 ‘경험적 내용에 토대론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계승하거나 ‘반복’한다. ”(존 라이크먼, 『미셸 푸코, 철학의 자유』, 그린비, 173쪽)
푸코는, 인식의 ‘조건’에 대해 질문했다는 점에서 칸트나 후설과 일치합니다. 인간의 인식은 객관 세계의 순수한 투영이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푸코는 그러한 조건을 인간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시도는 무망한 것임을 주장했고, 나아가 인식 자체를 어떤 보편적(탈역사적) 토대 위해 세우려는 시도 자체를 회의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지식의 조건들은 익명적 담론의 총체가 출현하고 변화하는 가운데 발견됩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은 ‘역사적’이며 특정한 목적이나 본질 같은 것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우연적’입니다. 칸트와 후설은 인식하는 자인 인간을 자신의 인식의 토대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선험적-경험적’ 이중체로서의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이는 어떤 점에서 (앞서 말했듯) ‘신 없이 살기’의 한 가지 시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푸코는 (니체를 계승하여) 그런 식으로는 ‘신의 죽음’을 완료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신 없이 산다는 것은 신의 자리에 다른 무엇(인간, 화폐, 국가 등)을 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토대 없이 사는 것, 일반적이고 결정적인 진리를 포기하는 것, “세계가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전연 다를 수 있다는 점”(폴 벤느, 『푸코, 사유와 인간』, 산책자, 66쪽)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지는 않습니다. 허무주의적이지 않습니다. 단지 ‘근본적’이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것들로부터 가치를 이끌어내고 그런 것들에 자신의 구원을 의탁하려는 (마치 신앙인과도 같은) 습관을 버릴 뿐입니다. 대신에 푸코는 회의와 그를 통한 자기변형을 적극적 실천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푸코의 적극성, 실천성, 긍정성이 무엇인지 계속 알아가보도록 하죠.
다음 시간에는 조시 코언의 『HOW TO READ 프로이트』 1~5장을 읽고 세미나를 합니다. 발제는 1장 소현샘, 2장 후남샘, 3장 난희샘, 4장 현정샘, 5장 미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간식은 은주샘께서! 다음 주에도 『푸코의 맑스』 꼭 챙겨오시고요.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아ᆢ신없이 산다는 것이 절에나 교회를 더이상 안나간다는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이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이미 전제된 (나의)세계를 포기해야한다는 의미로 읽혀요. 생각할수록 심상찮은 문제입니다.
순식간에 지나갔던 세미나를 꼼꼼히 수습한 공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ᆢ푸코의 맑스는 꼭 챙겨갈게요~~
아ᆢ신없이 산다는 것이 절에나 교회를 더이상 안나간다는 문제가 아니고 근본적이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이미 전제된 (나의)세계를 포기해야한다는 의미로 읽혀요. 생각할수록 심상찮은 문제입니다.
순식간에 지나갔던 세미나를 꼼꼼히 수습한 공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ᆢ푸코의 맑스는 꼭 챙겨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