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HOW TO READ 프로이트』 1~5장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샘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모든 것을 억압된 성욕으로 해석하는 어딘지 음침한 이론,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반박당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성’을 실체화한 비역사적인 학문(푸코의 『앎의 의지』). ‘반박’과 ‘비판’을 통해 프로이트를 접해왔으나 막상 그의 이론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막상 균형잡힌 관점으로 프로이트를 해설하는 책을 읽고 보니, 프로이트는 몹시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사상가였습니다. 자신이 코페르니쿠스, 다윈에 이어 인류의 자의식과 허영심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는 프로이트 자신의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의식으로 하여금 자기 안의 타자를 마주하게 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정말로 현대성을 열어낸 사상가들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HOW TO READ 프로이트』는 프로이트의 환자였던 에마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혼자서 가게에 들어가지 못하는 강박증을 지닌 에마. 그녀는 이 증상에 대해 나름대로의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열두 살 때의 기억인데요. 에마가 가게에 들어갔을 때 점원들이 그녀를 보고 웃었고, 에마는 그것을 자신의 의복에 대한 비웃음이라고 느꼈습니다. 수치심을 느껴 달아난 에마는 그 이후로 가게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알고 보니 에마의 강박증은 여덟 살 때의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가게 주인에게 추행을 당했던 당시 여덟 살 에마는 그 생소하고 충격적인 경험을 이해하거나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마의 무의식은 그 경험을 억압했고, 내상으로 축적된 에너지는 열두 살 때의 경험을 매개로 의식의 표면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프로이트가 에마의 케이스에서 의식이나 이성의 실수, 오류, 기능장애, 광기 같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무의식의 합리적인 메커니즘을 발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이때의 합리성은 이성의 합리성과는 다른 모습입니다만. 에마의 무의식이 기억을 조작한 것은 ‘쾌락원리’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신경조직은 자극이 최대한 낮고 평평하게 흘러 경제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30쪽) 있습니다. 쾌락의 원리는 해소의 욕구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러한 작업을 경제적으로 수행하자면 “쓸데없이 과도한 자극을 제거하는 것”(30쪽)이 가장 중요합니다. 에마의 경우에는 여덟 살 때 겪은 충격적인 사건과 그 기억이 일으키는 과도하고 불쾌한 자극을 회피하는 것이 필요했겠지요.
인간의 정신은 자신이 무엇을 겪을지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겪은 일과 그 체험의 여파를 없앨 수도 없지요. 성 잠복기인 유아 시절에 추행을 당한다면, 에마처럼 청소년이 되어 성적 충동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 커다란 정신적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대신에 인간의 무의식은 경제성의 논리에 따라서, 자신의 체험을 견딜만한 것으로 대체할 수는 있습니다. 에마의 경우엔 감당할 수 없는 추행의 충격을 좀 더 완화된 형태의 수치심으로 변환시켜 표출한 것이지요. 의식은 알려지지 않은 텍스트에 대한 주석이라고 했던 니체의 말이 떠오르네요. 이처럼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이란 정신 전체의 아주 작은 한 영역일 뿐이며, 전체적인 정신 활동의 결과가 떠오르는 표면일 따름임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타자다”라는 랭보의 시는 프로이트 사상의 슬로건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현실의 규범에 복종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의 무의식과 욕망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넘쳐흐릅니다. 케이크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을 먹고자 하는 욕망이 아무런 모순도 없이 서로 공존하는 것이 바로 무의식의 세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 이러한 미지의 영역과 늘 마주보고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꿈으로, 농담으로, 실수로, 히스테리로 무의식은 자신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표출합니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라는 것을 순순히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프로이트가 보여주는 인간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선험적인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에 의해서, 자기 안에 있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공생하고 있는 타자와 끊임없이 대화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의식적 자명성을 허물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다음 시간에는『문학의 고고학』 3부를 읽고 옵니다. 발제는 미영샘과 청샘께서 맡아주셨고요, 간식은 미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은 텍스트였습니다. 왜 프로이트 프로이트 하는지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구요. 저는 무의식은 절대로 의식에 자기 존재를 그대로 노출시키지 않는다, 늘 전위와 압축이라는 위장술 즉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는 대목, 그걸 멜빌의 <사기꾼>을 예로 설명하는 저자의 친절에 감탄했습니다. 니체가 왜 '표면이 깊이'라 했는지, '가면' 과 '오류'로써의 세계가 더 풍부하고 그걸 사랑하라고 했는지 좀 이해가 됐습니다. 지난 시간 읽은 칸트도 읽기 전에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프로이트도 읽기 전에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공부를 안했다면 남들이 하는 이야기만 듣고 오해만 쭉 하다가 죽을 뻔 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