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에 관한 강의
『문학의 고고학』 Ⅲ장은 푸코가 사드의 텍스트와 관련하여 강의한 두 번의 강의 내용입니다. 첫 번째 강의는 사드에 있어서의 진실과 욕망의 관계를, 두 번째 강의는 1970년 11월의 『담론의 질서』에서 나타나게 될 기본적 문제 설정을 보여준다고 하는군요.
첫 번째 강의에서 다룬 텍스트 『쥐스틴 이야기』, 이 책은 1797년 출간된 것으로 일종의 보고서 같은 텍스트였답니다. 이는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있던 1787년, 쥐스틴을 주인공으로 쓴 사드 최초의 소설입니다. 사드는 자신의 소설들은 “전적으로 진실의 기초 아래 놓여 있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이야기하려는 바와 관련하여 문인이 겪은 역겨움과 공포에 대해, 문인이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철학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범죄를 있는 그대로, 의기양양하고도 숭고한 것으로서 보여주겠노라! 사드는 자기 소설이 갖는 절대적 진실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는데 다음과 같은 식입니다. “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는 있을 법하지 않은 걸로 보일 수 있다(…) 이 것은 소설에서라면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이겠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들에게 지금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라는 거에요. 그렇다면 대중에게 상상을 넘어서는 기괴한 엽색 행각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는 사드. 그가 말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18세기 소설가들의 있음직함- 진실과는 전혀 닮지 않은 진실, 이야기의 내용 자체가 글자 그대로는 이해될 수 없는 진실. 여기에서 사드가 말하고 있는 진실은 추론의 진실입니다. 18세기 소설의 문제는 감동을 주기 위한 하나의 허구를 ‘있음직함’이라는 형식 아래 확립하는 것이었지만 사드는 하나의 진실을 분해하는 것이었죠. 이것은 그 시대의 소설과 완전히 판이한 작법입니다. 말하자면 기존 관념과 상식을 뒤흔드는 혁명적인 글쓰기 방식인 거죠.
그의 작품 『쥐스틴』이라는 소설의 관건은 살인, 야만성, 지배의 수행 및 욕망의 수행을 통해 하나의 진실일 무엇인가가 드러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드는 자신이 쓴 끔찍한 이야기들을 읽고 독자들이 반발하거나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지만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자기는 독자들의 이성에 말을 건네기 위해서랍니다. 이 시대의 근본적인 진리, 악덕은 늘 보상을 받고 미덕은 늘 벌을 받는, 이 진리를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거에요.
예를 들어 미덕을 지닌 쥐스틴이 불행을 겪는 것은 그녀가 추론상의 오류를 저질렀거나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거죠. 쥐스틴은 완벽하게 계산을 했지만 늘 자의성과 우연의 질서에 의해 끔찍한 불행이 일어나게 되더라면서 쥐스틴의 불행은 늘 우연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런 스토리 현실에서 흔히 보는 장면 아닌가요? 어려서는 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겪는 불행을 보면서 신을 부정할 때가 많았습니다. 신이 있다면 신은 대체 왜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벌을 주지 않고 별 죄도 없는 사람의 불행은 그대로 두고 보는가. 이것이 현실 원리인데 우리가 과거에 보던 책들 대부분은 내 마음을 읽은 듯 통쾌하게도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는 스토리가 많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걸 해피엔딩으로 알았고 그런 스토리야말로 합당하다고 믿었습니다. 학교와 사회가 가르쳐 준 선악을 가르는 도덕성. 생각해 보면 욕지기가 올라오는 그런 고답적인 틀을 그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거지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고 속에 사회가 유포한 선악의 기준이 진리의 기준점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흔히 봅니다만.
사드는 자신이 글을 쓰는 것이 우리의 이성에 말을 건네기 위해서, 이러한 근본적인 진리 –악덕이 보상받고 미덕이 벌을 받는 현실 원리의 진리- 의 증명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푸코는 사드가 왜 이러한 글쓰기를 하는지, 그의 텍스트를 통해 그의 글쓰기의 기능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 사드의 말을 한 번 들어볼까요? 그는 말하기를 “소설가는 자연(nature)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야 한다” 여기에서 nature는 자연 대신, 본성 혹은 본질로 번역할 수도 있답니다. 글을 쓰면서 “어떤 방해물에 의해서도 제한되거나 억제되어는 안 되며” “이런 재갈을 부수어 버리고 이야기의 모든 지엽말단을 파괴할 수 있는 권리를 마음껏 사용하여 자신의 관심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밀고 나가라!” 말하자면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으나 신이든 뭐든 그 어떤 절대자, 사회가 정한 도덕과 이데올로기 등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갈 수 있는 데까지 한계를 두지 말고 가보라! 이 우주 내에 자리한 모든 한계의 틀을 깨부수라는 것 아닙니까. 아, 그런 글쓰기를 할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우 유혹적인 말이지만 새가슴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드의 말처럼 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건 글을 조금이라도 써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혹여 이 글을 쓰고 비난받지나 않을까, 남에게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작은 치부 하나도 드러내기 어려운 경우를 경험하지 않았나요? 예전에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수록 근엄한 표정으로 설교에 가까운 교훈을 늘어놓는 사변적인 글쓰기를 해온 경향이 있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에도 그런 글들을 고상하고 교양있는 것마냥 잘 쓴 글로 소개하는 시절이 있었지요.
그러나 사드는 글쓰기에 있어 듣는 자의 이성에 호소하는 합리적인 무언가가 전혀 없이 성적 몽환으로 가득한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거죠. 사실 내가 혼란스러웠던 지점이 여기에 있었던 것 같은데 예리한 푸코!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을 독자들의 질문을 예상했나 봅니다. “사드는 자신의 상상을 즐기듯이 글쓰기를 즐기거나 자신의 상상을 더 잘 활용하기 위하여 글쓰기를 하면서 우리에게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식의 비양심적 뻔뻔스러움으로 우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대신 물어줍니다. 사실 나는 은연중 사드같은 성적으로 문란한 이가 진실을 말한다고? 그것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을 공부하고도 여전히 순간적으로 진실, 진리가 지엄한 외부에 있는 듯이 착각하고 있는가 본데. 아, 정말 이 진부하고도 지겨운 사회적인 도덕성과 관념은 끈끈하게도 의식 속에 달라붙어 있네요.
사드가 ‘나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쓴다’고 했을 때 사드에 있어서 진실 말하기는 18세기 소설 작법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욕망, 환상, 상상력을 진실과의 어떤 관계 안에 확립하는 것이었답니다. 이 진실과의 관계는 더 이상 욕망에 반대되거나, 욕망에 대해 안된다고 말하거나, 욕망에게 ‘네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어’라거나 그건 그저 ‘환상이고 상상일 뿐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현실 원리가 존재하지 않게 될 그러한 관계. 사드에 따르면 전적으로 욕망에 복종함으로써 욕망을 작동시키고 증식시키는 글쓰기가 현실 원리를 단번에 몰아낸 이후로, 환상의 검증은 더 불가능해졌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환상이 진실한 것이 되고 상상력 자체가 자신의 증명이 된다. 유일한 증명은 하나의 환상을 넘어서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환상을 찾아낸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진짜는 가짜, 환상으로 취급하면서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짜 현실 세계는 보지 못하고 환상 속의 세계를 현실처럼 여기면서 전도된 사고와 인식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사드에게 글쓰기는 어떤 한계도 없는 지점에 도달하고야 말 욕망으로, 그에게 글쓰기는 진실이 되어버린 욕망, 욕망의 형식을 지닌 진실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드가 글을 쓰는 이유라고 하는데 사드에게 글쓰기는 진실을 구축하는 실천이었던가 봅니다.
푸코는 이와 같은 사드의 글쓰기 방식을 설명하는 의도가 자신의 저작 『담론의 질서』의 기본 설정으로 삼기 위해서라고 하는군요. 그렇다면 담론과 욕망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푸코는 담론과 욕망은 서로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진실과 욕망 또한 어떤 특정한 메커니즘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담론과 장면을 가로지르는 비존재의 확증으로 가득찬 사드의 글을 통해서. 그런 의미에서 사드의 텍스트가 딱 안성마춤이었겠구나, 토론 내내 알 듯 말 듯 애매하던 지점들이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가 가네요.^^
대충이나마 정리해보는 의미에서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미영 샘이 발제한 두 번째 강의 내용은 나 혼자 다시 정리해 보는 것으로 이만 총총총 하겠습니다.^^
하하하! 사드의 글쓰기에서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 으로 ㅋㅋㅋㅋ 급전환이 웃음을 주네요
청샘 날개를 다셨군요! ㅎㅎ 후기를 이다지도 잘 써내시다니, 알듯말듯한 사드를 잘 정리하셨네요. 사드를 읽으며 저는 우선 그의 기괴한 행보를 이해해 보고자. 아하 그래 그가 감옥에서 그리 오래 있었으니 그랬겠지 했답니다. 그러나 토론 중 그가 기괴한 짓을 저지르고 글로 쓰고 해서 감옥에 갔다는 사실에 분개했는데, 그의 글을 글쓰기라는 차원으로 본다면 18세기 '감동을 주기 위한 하나의 허구'를 분해하는 혁명적인 글쓰기라면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의 푸코는 그러한 '진실 말하기'의 관점, 형식, 한계까지 나아가는 지점을 보았겠죠. 그의 기괴한 행동이 아니라. ㅎㅎ 그리 위안 삼고 싶다는 생각도 들면서, 어떤 방해물이든 신이든, 사회의 미덕이나 도덕이라도 무엇이라도 잡히지 말고 밀고나가라, 한계를 두지 말아라는 지점에서는 어떤 통쾌함이 느껴졌습니다. 샘이 '아, 그런 글쓰기를 할 수 두둑한 배짱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그래도 샘은 그쪽으로 한발이라도 내딛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충실한 글 자~아~알 읽었습니다. 그래도 한번 더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듯하기도 합니다만, 참! 사드도 칸트도 프로이트도 후설도 엄청 어렵게 느껴졌지만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져 꼭 다시 한번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