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는 사드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으며 사드의 지지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공공연하게 경멸하기까지 했다.”(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1926~1984』, 그린비, 59쪽)
20대 초반의 푸코는 사드를 열렬히 읽었고 사드를 지지하지 못하는 도덕군자들을 비웃었다고 합니다. 사드 후작. 그는 정말로 문제적인 인간입니다. 변태적 성욕을 대방출하며 기행을 벌이고 고문과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죠. 어린 시종들을 상대로 음란행각(?)을 벌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평생 감옥을 전전하고 도피생활을 했던, 그 와중에 계속해서 자신의 욕망을 글로 표출했던 사드. 우리는 이 사람을 지지할 수 있을까요?
물론 죽은 지 200년도 더 된 프랑스인 작가를 우리가 지지하고 말고 할 문제는 아니겠지요.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사드와 같은 기인, 비정상인, 범죄자, 변태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작년이었던가요. 푸코에 대해 아동성범죄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었죠. 거짓으로 밝혀지긴 했습니다만,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푸코의 말을 진지하게 들을 수 없게 되는 걸까요? 우리는 범죄성을 지니고 있다고 우리 시대의 담론에 의해 판정받은 어떤 이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합니다. 단순히 들을 가치가 없다는 감각이 아니라 마치 그의 행동만큼이나 그 사람의 말에도 어떤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기라도 하다는 듯 그런 목소리들을 차단해버리죠. 비정상인들의 말은 의학이나 범죄학, 사회학 등의 ‘독백’에 의해 파묻혀버립니다. 어떤 범죄자의 모습이 미디어에 노출되는 순간 각종 전문가들이 나서서 그들의 행위와 말을 자기들의 담론으로 번역하고 해설해줍니다.
분명한 것은 사드가 비범하고도 성실한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그의 기행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꾸준한 자기 탐구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탐구의 일환으로 끊임없이 글을 썼습니다. 푸코의 강의록을 읽다보니 사드가 궁금해졌습니다. 푸코의 강의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욕망과 담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사드의 소설에는 엽기적인 장면들의 묘사와 신, 법, 자연 등에 대한 리베르탱들의 담론이 나란히 놓여 있다고 합니다. 장면과 담론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푸코의 섬세한 분석에 따르면, 등장인물들이 행하는 담론은 그의 행위나 욕망과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선 담론은 욕망을 거세하는 이데올로기적 담론들을 전복합니다. 기존의 담론들은 긍정으로부터 부정으로 나아가는 절차를 따릅니다. 신이 존재한다(긍정), 따라서 어떠어떠한 불경한 행위들을 해서는 안 된다(부정). 리베르탱들의 담론은 반대 방향의 운동을 조직합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부정), 그러므로 이러저러한 행위들은 용인된다(긍정). 또한 담론은 리베르탱과 희생자를 구분하는 기능을 수행하고(리베르탱들은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같은 물음으로 상대가 동등한 존재인 파트너인지 마음대로 대해도 좋은 희생자인지를 구분합니다), 동료 리베르탱들 사이의 경쟁의 장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드에게서 담론과 진리가 욕망에 대한 합리적 이론을 전개하거나(프로이트) 욕망을 해방하는(마르쿠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담론은 욕망을 촉진시키고 개별화하고 변형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사드 자신에게 글쓰기가 욕망의 쾌락적 현실을 구축하는 일이었듯, 그의 텍스트 안에서 욕망과 담론은 서로를 강화하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사드는 진리의 욕망하는 기능을 복원하고자”(푸코, 『문학의 고고학』, 인간사랑, 292쪽)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드는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에서 아주 독특한 자리를 점하고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성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려던 시대에, 이성으로 하여금 욕망하도록 한 작가.
욕망과 담론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걸까요? 푸코는 프로이트와 마르쿠제를 언급하는데, 두 사람은 욕망과 담론 양자를 분리시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닙니다. 프로이트는 욕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죠. 지난 시간에 보았듯, 그는 환자들의 증상의 근저에 있는 무의식의 ‘합리적인’ 메커니즘을 밝히고자 했습니다. 물론 인간의 의식이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무의식은 괴물이 아니라 그 나름의 법칙을 지니고 있는 우리 안의 타자라는 점을 밝혔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혁신적입니다. 그러나 분명 그는 여전히 담론 쪽에 서서, 욕망과 무의식의 ‘경제적인’ 원리를 의식적으로 포착해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한편 마르쿠제에게 관건은 “진실 담론을 통해, 모든 종류의 구속으로부터 욕망을 해방시킬 수 있는가의 여부”(푸코, 『문학의 고고학』, 인간사랑, 293쪽)였습니다. 이성이 환상과 미신을 걷어내고 나면 욕망은 이제 전혀 욕망하지 않거나 오직 순수하게 욕망합니다.
프로이트와 마르쿠제는 이성에게 ‘설명하는’ 역할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의 의식적 담론은 인간 자신을 포함한 인식의 대상들을 합리성의 틀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관찰자의 자리를 점하고 있는 걸까요? ‘인간은 옳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좋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좋다고 느끼기 때문에 옳다고 판단한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이성은 느낌이나 충동, 욕망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요? 니체가 그리스 비극을 해석하며 근대적 합리주의로부터 병의 징후를 읽어낼 수 있었듯 푸코 또한 사드에 대한 독해를 통하여 근대적 에피스테메를 해부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학기가 끝났습니다. 샘들과 함께 푸코 평전을 읽으며 푸코의 삶을 통하여 정치, 배움, 아카데미, 참을 수 없음, 지식인, 섹슈얼리티, 쾌락과 윤리 등등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은 제게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각자의 사정으로 『말과 사물』 준비 단계인 7주차부터는 결석이 많았는데요. 못 나오신 분들도 좋은 책들이니 방학동안 들춰보십쇼~~ 2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말과 사물』에 돌입하니 절대 결석 없도록 해주시고요!
카톡으로 공지드렸듯 2학기 첫 시간에는 『말과 사물』(민음사) 서문과 1부 1장(~43쪽)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제가 준비하고요, 후기는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5월 2일에 뵙겠습니다!
건화샘 후기를 읽으니 좀 이해가 가는 듯합니다. 프로이트는 담론 쪽에 서서 욕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하고, 욕망과 무의식을 '경제적' 원리로 의식적으로 포착하려 하고, 이성에게 '설명하는' 역할을 부여했군요. 그렇게 보니 프로이트는 참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인간이네요. 그런데 건화샘 질문대로 우리는 합리성이라는 틀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관찰자의 자리를 점하고 있는 걸까요? 참 깨기 힘든 틀입니다. 그레서 공부라는 걸 해야하는지~~~ㅠㅠ~잘 읽었습니다. 한 학기 반장하느라 고생많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