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02 푸코 「말과 사물」(2) 후기
드디어 푸코의 「말과 사물」을 공부하는 2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과제는 단지 서문과 1장 1부의 시녀들을 읽어오는 것이었는데, 푸코를 읽는다는 기대와 달리 ‘단지 읽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주리가 틀리도록 고단한 시간이었습니다. 읽는 내내 ‘아! 푸코는 정말 글을 잘 쓰는 구나. 그런데 나는 정말 이해를 못하는 구나’라는 탄식이 글과 함께 겹쳐서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채운샘께서 서론과 고전주의의 에피스테메를 보여주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한 푸코의 해석에 대해서 강의해주셨어요.
책을 읽기 전에는 제목이 무척 근사했어요. 그런데 읽기 시작하니 「말과 사물」 혹은 「사물의 질서」라는 제목부터 막막합니다. 푸코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 파악이 잘 안되어서 제게는 이 책의 제목을 이해하는 것이 최종적 목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 사물, 질서가 같이 놓여있는 게 마치 보르헤르의 신기한 동물들의 분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게는 말, 질서, 사물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관계를 모색할 만큼 같은 사유의 범위 안에 있는 않은 생소한 조합이었거든요. 푸코는 서문에서 말과 사물 그리고 질서를 동시에 그리고 역사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탄생시킨 장소가 이 책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문화라고 불리는 그것들의 깊은 지층을 파헤쳐서 단단하다고 간주한 표면의 매끈한 질서 아래에 무질서한 우글거림, 단절, 균열이 있음을 보여주는 그 시도라고 합니다. (p22)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 질문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면 푸코가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말, 사물, 질서의 관계입니까? 말과 사물, 사물의 질서입니까? 말과 사물, 사물의 질서, 문화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요? 그런데 갑자기 왜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대한 분석이 등장하나요?
한 문화의 기본코드는 각자가 상대하게 되고 다시 처하게 되는 경험적 질서를 처음부터 결정한다. 그리고 언어, 인식의 도식, 교환, 기술, 가치 체계, 실천의 위계 등을 지배한다. 사물의 배열에 관한 이론과 해석에는 확고한 토대로 간주된 이 질서가 배경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하나의 숙고된 분류를 정립할 때 “그 기본코드, 질서의 이름으로” 언어, 지각, 실천의 코드들이 비판 또는 부분적으로 무효화된다. (p14,15)
초현실주의자들이 낯선 이미지를 한 판에 등치시켜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과 같이, 낯선 사물들이 같은 토대에 놓여있는 경우에 어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사물에 본래의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의미는 그 사물이 놓여 있는 토대 즉 관계의 망 안에서 의미가 발생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물이 놓여있는 공통된 장소가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 사물들이 놓여있는 토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지금의 토대는 역사적인 진보의 결과일까요? 태초부터 원판이 있는 것인데 인간의 인식에 한계가 있는 것일까요? (사물을 인식의 대상으로, 놓여있는 토대는 사유의 범위로 대치시켜서 이해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유용성의 기준으로 세계(언어, 지각, 실천의 코드)를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이미 장소에 소환되는 사물에는 일정한 분류의 기준과 범주 즉 문화가 가지는 기본 코드, 질서가 전제됩니다.
푸코는 이미 확고한 것으로 자리 잡은 질서를 계보학적으로 탐구함으로써 달리 말하면 어떤 문화에서 의미로 출현하는 것의 토대를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앎의 역사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어떤 문화 안에서 살기 때문에 그 문화를 만들어내는 질서에 초월적인 관점을 둘 수 없습니다. 문화 안에서는 그 질서는 무척 당연하고 확고하고 불변할 것으로 간주됩니다. 푸코는 그러한 질서를 전제로 형성되어 있는 것들의 기원을 파고 들어가면서- 마치 발굴현장의 과거의 파편적인 표식들을 계열화해서 무엇으로 존재하였는지를 복원하는 고고학자처럼- 질서의 순수한 원형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하고 뒤섞인 여러 힘들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푸코가 분석하는 대상은 중간영역에서의 경험이라고 합니다. 이 중간영역은 이미 확립된 질서의 코드와 질서에 관한 성찰의 사이에 어떤 거리가 생기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중간영역에서 질서는 다양한 압력에 따라 즉 문화와 시대에 따라, 공간 혹은 시간에 따라, 연속· 점진 혹은 분산· 불연속의 형태로, 변수들 혹은 일관성의 체계로, 연속적, 대칭적, 중심적 증가 방식으로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즉 중간 영역은 질서의 존재 양태를 드러내게 하고, 이것에 대한 우리의 맨 경험이 존재하며 푸코가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경험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가능적 조건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근대 이전의 재현 즉 말해진 그대로의 언어, 지각되고 분류되는 그대로의 자연, 실행된 그대로의 교환에서 그 기원을 파고들어가서 어떤 질서가 존재하고 교환의 법칙, 생물의 규칙성, 말의 연쇄, 말이 갖는 재현의 가치가 그 질서의 양태(관계에 의해서 표면에 형성되어 드러난)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문화는 이 질서와 유래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냈는가를 연구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p16)
질서의 어떤 양태가 인정되고 상정되고 공간 및 시간과 엮였길래, 예를 들어 문법과 문헌학, 자연사와 생물학, 부(富)에 관한 연구와 정치경제학에서 전개되는 그러한 인식의 실증적 기반이 형성되었는가를 보여 주려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p16) 우리가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 그러한 인식을 형성시키는 가치나 객관적 형태와 관계하는 조건과 무관하게 인식을 검토하고, 실증성을 묻지 않고 인식의 완벽성이 증대하는 역사보다는 ‘인식을 위한 가능조건의 역사가 드러나는 에피스테메’이다. 여기에서 지식의 공간에서 인식의 다양한 형태를 야기한 지형(구조)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p17)
(에피스테메épistémè - 어느 주어진 시대에 특정 학문 분야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 담론의 양태들을 연결하는 관계 전체)
푸코가 주목한 서양의 에피스테메의 중대한 두 불연속은 고전주의 시대와 근대(19세기) 이후입니다. 채운샘께서 이 두 전환기에 실증성의 체계가 변했다고 하셨는데 이 부분이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실증적이라고 하면 사고에 의하여 논증하는 것이 아니고 경험적 사실의 관찰과 실험에 따라 적극적으로 증명하는 혹은 증명되는 것입니다. 일차적 질서는 말, 지각, 행위로서 은연중에 알게 되는 경험적 질서입니다. 실증성의 체계가 변했다는 것은 실증성이 일차적 경험 질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경험의 이면에 있는 조건까지 실증의 범위를 확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푸코는 경험적 질서 자체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그 경험적 질서가 구성되는 근원적 토대이자 그 질서를 구성하는 조건, 선험적 인식의 조건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또 질문이 생깁니다. 선험적 인식의 조건이란 이미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어서 인식의 과정으로 들어가면 구조적으로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만드는 것인데, 선험적 인식의 구조를 만드는 압력은 누적된 경험이 아닐까요? 이런 질문이 인과적으로 역사를 분석하는 것일까요? 푸코의 선험적 인식의 구조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선험적 인식 그 자체에 중점을 두기보다 선험적 인식의 구조를 만든 여러 힘관계, 조건, 지식의 지형을 파헤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푸코가 분석하고자 하는 불연속적 경험 중에 고전주의 시대에 대상으로 삼은 것이 재현(representation)의 이론, 언어, 자연계의 범주, 부의 가치의 이론 사이에 존재하는 일관성의 변화입니다. 19세기부터 모든 가능한 영역의 토대로 작용한 재현의 이론이 사라지는 불연속이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재현과 사물 사이의 중계 언어가 사라지고 역사성이 사물의 중심으로 침투합니다. 시간의 연속성에 함축된 질서의 형태를 사물에 부과하면서 사물은 증식, 생성의 질서 안에 놓여지게 됩니다. 언어에도 그 자체에 대한 연구보다 언어가 가진 두터운 과거와 배경, 심층적인 의미를 분석하고자 합니다. 사물에 대한 이해 가능성의 원리가 ‘사물의 생성’에서만 모색되고, 사물이 재현의 공간을 떠나 버리면서 그 자치를 대신 차지한 것이 인간에 대한 관심입니다. 역사상 최초로 인간이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19C 근대의 불연속, 이 균열 안에서 신인본주의에 대한 온갖 환상이 섞인 인간학이 출현하게 됩니다.
푸코의 해석으로 근대에 들어서 사라진 고전주의 시대의 재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입니다. 이 그림은 그야말로 풍경, 인물 대신에 “재현”을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고전주의 시대의 재현이 드러나는데, 재현의 주체가 부재한 방식입니다. 이 세계를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주체가 없습니다. 재현을 성립시키는 모든 조건 즉 빛, 화가, 화구, 모델은 모두 그림에 드러나는데 정작 이 그림을 장악하는 주체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도, 그림을 그렸을 화가도, 모델이 되고 있는 왕과 왕비도 그 그림을 주인, 주체로서 독점적 시선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의 캔버스의 정면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재현의 대상을 특정할 수도 없습니다. 푸코는 이로써 존재론적 실체를 구성하는 원리인 동일성으로부터 마침내 풀려나 순수 재현이 출현했다고 해석했습니다.
고백하건데 이해를 잘 못하겠다는 말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 답답한 상태는 이해를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가 문을 닫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푸코의 「말과 사물」의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시간이 길수록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쓰여야 이해할 수 있다는 저의 고집이 더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채운샘 덕분에 이 낯선 책이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안심이 조금 들었습니다. 부디 모른다는 고집 대신에 환대로 쭉 읽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개념들 정리해주셔서 몇가지 메모하며 읽었습니다. 설샘 상세한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