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시녀들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1장 전체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에 대한 해설로 채워져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푸코의 ‘그림 읽기’ 자체가 좀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1장 중간쯤 푸코는 “언어와 회화는 서로 환원될 수 없다.”(34쪽)라고 말하는데, 그는 이런 생각에 충실한 채로 그림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화폭 위에 무엇이 묘사되어 있는가, 혹은 그것을 묘사함으로써 벨라스케스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가 라는 식으로 물음을 던진다면 결국 우리는 캔버스 너머에서 어떤 고유명사들이나 언어적 상징들을 끄집어내게 될 것입니다. 이는 결국 ‘그려진 것’을 ‘말해진 것’으로 환원하는 일이 되겠죠.
대신에 푸코는 시선의 역학을 추적하고 재구성합니다. 관람객으로서 우리는 그림을 보지만, 어쩌면 그림 또한 우리를 봅니다. 우리는 그려진 것들을 보지만 그려진 것 자체가 더 많은 것들을 감추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그림과 마주칠 때 실제로 작동되기 시작하는 시선의 역학들과 가시성-비가시성의 게임들. 푸코는 이런 것들을 언어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기깔나게 ‘번역’해냅니다.
“재현은 여기에서 자체의 모든 요소, 자체의 이미지들, 가령 재현이 제공되는 시선들, 재현에 의해 가시적이게 되는 얼굴들, 재현을 탄생시키는 몸짓들로 스스로를 재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재현이 모으고 동시에 펼쳐 놓는 이 분산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본질적인 공백이 뚜렷이 드러난다. 즉 재현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 달리 말하자면 재현과 닮은 사람, 그리고 재현이 닮음으로만 비치는 사람이 사방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 주제 자체, 즉 동일 존재는 사라졌다. 그리고 재현은 얽매어 있던 이 이해 방식으로부터 마침내 풀려나 순수 재현으로 주어질 수 있다.”(푸코, 『말과 사물』, 민음사, 43쪽)
그래서,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가지고 하려는 말은 뭘까요? 푸코는 ‘순수 재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체, 동일 존재의 소멸로 인해 드러난 ‘본질적인 공백’으로부터 출현하는 순수 재현. 푸코가 말하듯, 벨라스케스의 그림에는 재현의 모든 요소가 존재합니다. 그림 안에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는 방문자(관람객)이 출입문 옆에 있습니다. 화가와 그의 캔버스, 팔레트, 그리고 공간을 채우는 빛이 존재하죠. 화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모델일 것으로 추정되는 왕과 왕비의 얼굴은 가운데에 놓인 거울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관람객, 화가, 모델의 시선은 또한 그림 밖의 한 자리에서 뒤섞이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닫혀 있는 그림 왼쪽에 놓인 화가의 캔버스. “캔버스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시선의 중립적 궤적 속에서 주체와 객체, 관람자와 모델의 역할이 한없이 뒤바뀐다.”(27쪽)라고 푸코는 말합니다.
아마도 푸코는 자신이 앞으로 설명할 르네상스, 고전주의 시대 에피스테메에 대한 이미지로서 벨라스케스 그림의 ‘주체 없는 재현’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장을 보면 거기서 인간이란 사물들 바깥에서 사물들을 관찰하는 자가 아니라 사물들의 질서를 형성하는 유사성의 체계의 중심에 놓이는 존재입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인간’의 특권적 자리가 부재한다는 것을 푸코는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요? 앞으로 읽어나가며 확인해보도록 하죠.
다음주에는 『말과 사물』 2장 ‘세계의 산문’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과제는 일요일 12시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시고요. 간식은 성연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