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말과 사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주 채운 선생님의 강의와 서론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1장 시녀들을 읽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녀들은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그린 그림 제목입니다. 채운 선생님은 시간에 관심을 가졌던 들뢰즈가 음악을 탐구한 것에 비해 푸코의 관심은 공간을 향했기에 그림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푸코는 왜 이 그림으로 책을 시작하고 한 챕터를 할애 했을까요? 푸코는 통사법으로 규정되는 언어는 보이는 것의 장소인 회화로 환원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언어에 온전히 담을 수 없습니다. 언어의 질서 안에 보이는 것을 온전히 가둘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언어와 회화의 관계를 열려 있는 상태로 유지하려면 언어가 닫아버리는 고유 명사를 지우고 존재하는 그대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말과 사물, 34, 35쪽) 따라서 화가가 어떤 의도로 무엇을 왜 언제 그렸는지를 설명해주는 익숙한 방식 대신 푸코는 화가에서 캔버스로, 빛에서 거울로 나의 시선을 분주히 움직이게 하고 마침내 그림의 안과 밖을 넘나들게 합니다. “이미지는 액자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라는 스승의 말을 벨라스케스는 뒤집어 적용합니다. 아마도 이미지의 아우라가 액자(그림의 물질성이 갖는 캔버스의 한계)를 넘어서게 그리라는 스승의 가르침이었을 텐데요. 벨라스케스는 캔버스의 뒷면, 안쪽 벽에 설치된 거울, 그림 밖 관람자의 자리 등 비가시적인 것을 그림에 끌어들여 가시적인 것으로 전환하고, 반대로 그려지는 것의 영역을 그림 바깥의 비가시적인 곳으로 확장하기도 합니다. 주체와 객체, 관람자와 모델의 역할이 한없이 뒤바뀌며 시선들의 관계가 발견되지도 확립되지도 못하게 방해합니다.(말과 사물, 27쪽). 이것은 그림이 관람자가 보는 것, 보여지기 위해 그려지 것이라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며, 관람자도 그림을 보지만 그림 속 인물들도 관람자를 본다는 보는 것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합니다. 그림 안에 존재하는 인물들, 즉 근거리에 위치한 공주를 중심으로 늘어선 인물군과 그 뒤에 위치한 화가, 저 멀리 열린 문 앞에 서있는 방문객은 그림 밖에 있는 나(의 자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시선이 교환됩니다.
<시녀들>이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암시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주체로부터 해방된 재현, 순수한 재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시녀들>에는 재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 즉 재현하는 주체, 재현되는 대상,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인 캔버스나 물감, 빛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재현하는 것과 재현되는 것이 모호하여 확정할 수 없습니다. 푸코가 중요하게 상정해 놓은 것은 그림 안이 아닌 그림 바깥의 자리입니다. 모델의 자리이자 화가의 자리, 관람객의 자리이기도 한 이 자리가 누구의 자리인지를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림 속 화가가 그리고 있는 캔버스 표면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캔버스의 뒷면만을 볼 수 있으므로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그림 안쪽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반영된 이미지를 확인함으로써 이 자리가 누구의 자리인지를 알아내려 해도, 거울의 원본과 이미지가 보여져야 거울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사실 거울이라는 것조차 확정하기 힘듭니다. 어떤 것도 이 자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시녀들>에는 정해진 주체의 자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재현과 재현의 대상이 맺어온 관계가 끊어집니다.
앎의 조건을 시대별로 파헤친 푸코는 이 그림을 보여주며 고전주의 시대에 앎이 어떤 방식에서 정리되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물과 유비의 관계를 맺는 기호가 시대의 에피스테메 였습니다. 기호와 그것이 지시하는 것, 사물과 표상이라는 이원적 관계가 고착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에는 기호가 유비와 상관없이 분리된 관념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기호는 그것이 재현하는 것 외에 다른 내용이나 기능을 갖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그것이 보여주는 것 외에 화가의 의도나 상징을 갖지 않습니다. 고전주의 시대를 지나 근대에는 사물 바깥에서 세계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특권적 존재로 인간이 자리하게 됩니다(예술을 묻다 303).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에는 인간이 사물의 질서 중 하나일 뿐 인식의 대상 겸 주체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재현의 재현으로서의 공간인 <시녀들>에는 재현 공간을 성립시키는 요소들만 그려져 있을 뿐입니다. <시녀들>은 재현과 재현의 대상을 끊임 없이 자리 바꾸며 재현의 작동 과정 자체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이로써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끊어지며 재현이 주체로부터 해방됩니다. 이러한 동일 존재의 사라짐으로 인해 공백이 드러납니다. 바로 이 공백에서 순수 재현이 시작됩니다.(말과 사물, 43쪽) 이렇게 <시녀들>의 순수 재현은 고전주의 시대 에피스테메에 인간이 부재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철학이 힘든 이유는 내가 익숙한 사고에 스스로 갇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푸코를 접하며 그의 천재성과 세계를 대하는 접근 방식에 놀라움과 흥미를 느낍니다. 그러나 또한 그만큼 이해하기조차 힘들어 애를 먹는 점이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앞으로 공부해 나가며 조금씩 내 자리를 이탈하면서 그렇게 나도 놓여나지 않을까요. 두렵고 기대됩니다.
그림을 언어 안에 정박시키는 게 아니라 언어를 경유하여 그림 자체에 변형을 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푸코의 그림 읽기가 놀라웠습니다. 샘께서 말씀해주셨듯, 우리도 푸코의 말들을 어딘가에 정박시키는 것이 아니라 푸코 읽기를 통해 스스로의 자리로부터 이탈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상세한 후기 감사합니다. 세미나시간에 나누었던 대화들이 리마인드 되었어요. 재현이 주체로 부터 해방되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3장에서 빗장이 풀려가겠죠 . 쓰여진 글을 이해하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푸코는 이런 글을 썼다니 대단하기도 하고 생각할꺼리를 던져주니 즐겁고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