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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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문의 목요일 저녁은 일리치 세미나가 있는 날입니다! 저는 칼퇴를 하고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규문에 도착하려고 하는데, 이번주에는 간식 담당이라, 부서 선생님들께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 있다고 양해를 구한 후, 무려 30분 조퇴를 하고 우리의 먹거리를 준비했답니다. (……아차차. 규문에서 육식은 안된다는 것을 또 놓치고, 순대를 간식상에 올리는 불찰을 범하기도 하였지만…요….. ) 사소한 것에서부터 저는 배우고 있습니다.
1. 1교시에는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을 돌아가며 낭독하고, 생각한 바를 나누었습니다.
1-1.‘아이겐리히트 Eigenlicht(자신의 빛, 고유광)로 반짝이며 빛을 발산하는Sendelicht(투과광) 중세 세계의 빛나는 존재를 그리던 화가들과는 대조적으로, 그 이후의 화가들은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 빛Zeigelicht(표시광), 그려진 해나 초에서 나와서 이 물체들을 비추는 빛(조명에 의한 빛)을 그렸다…‘<p36>
우리에게는 빛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고 자랍니다. 이 말이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어떤 사람에게는 고유광이 있다는 간증들을 듣기도 하구요. 자신의 빛을 어디에 감추고 살아가고 있는지, 어느 시대부터 우리에게 있던 빛들이 숨고, 존재를 비춰주는 빛, 보여주는 빛들만 드러나는 세상이 되었을까요. 죽을 때까지 고유광을 찾거나 보려는 실험에 도전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후고는 책이 눈의 약이라고 말한다.<p37>’
후고는 책이 약이 될수도 최고의 치료도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후고는 독자에게 페이지에서 발산하는 빛에 자신을 드러내라고, 그리하여 자신을 인식하라고, 자신의 자아를 인정하라고 권한다.<p38>’라고 하는데, 책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깨달아가며 인식하고 수용한다면, 책이 약도 치료도 되는 경험을 우리는 줄곧 하고 있지 않나합니다.
1-3.’내 코로부터 약 30인치/ 거기에 나라는 사람의 경계가 있고, 사이의 모든 경작되지 않은 공기는/ 경작되지 않은 파구스, 즉 지역이다.<p41>’
12세기에는 새로운 자아가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봉건적 위계질서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한 동네라는 공동의 사고방식을 떠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을 공동체를 떠나, ordo(질서)에서 자신을 지탱하고 구속했던 유대없이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자아’가 12세기에 탄생했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내적 거리를 둔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인데, ‘순례자<p43>’라는 의미가 재미가 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유배시켜 책의 페이지를 통과하는 순례를 시작하라<p43>’는데 ‘이 길에서 자기 자신에게 자아를 드러내는 빛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니, 우리의 공부와 통하는 지점이 있군요!
1-4.‘후고는 사물의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따르고, 관찰하고, 탐색한다.<p50>’
이 때의 질서는 ‘신의 창조 행위 때 확립한 그 우주적이고 상징적인 조화를 내면화하는 것’인데, ‘지혜의 탐색이란 우리가 페이지에서 만나는 질서의 상징을 탐색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가끔 저는 제가 할 수 없음에, 무력함에 감사하고 기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야한다는 근대 사회의 가치를 주입받았을 때에는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할 듯, 많은 것들을 나의 선택과 나의 결정의 산물로 여겨, 그 무게가 상당했었던 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서 후고는 질서를 따르고 관찰하고 탐색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우주적이고 상징적 조화를 내면화한다고 하는데, 이 우주적 시선에서 나는 무력하며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음을 인정하며 내려놓을 때, 자유로워지고, 그로부터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음에 공감이 가는 문장이기도 하였습니다.
2.2교시는 자크 르고프의 <서양 중세 문명>을 발제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1.중세 사회의 10~13세기는 한마디로 기독교 사회이며 ’기도하는 사람(사제)‘, 싸우는 사람(전사), 일하는 사람(농민)’의 세 위계가 있었습니다. ‘상인’들이 등장하면서 이 기존의 틀을 깨었는데, 상인계급으로 인해 폐쇄경제에서 개방경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상인 계급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신분 질서가 등장하는데 수직적이라기보다는 수평적이고, 신적이라기 보다는 인간적이되었다고 하는데, ‘수평적’, ’인간적‘이라는 말이 이상적인 이미지를 가질 때가 많기에 그러한 변화가 좋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지금 현대사회를 돌아보면 ’상인 계급‘의 등장으로 인하여 ’신‘이라는 중심축에서 ’자본‘이라는 또다른 중심축으로 힘이 옮겨간 것일 뿐이며, 도리어 ’자본‘이라는 힘이 가지고 온 삶의 방식의 변화가 파괴적이거나 분열적인 경우가 많음을 돌아보며, 지금의 시대가 중세 시대보다 우월하다거나 발전되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개인이 무시되는 사회였고, 공동체 사회였는데, 그 때는 가족의 개념보다는 더 큰 공동체에서 연대하며 살았다는 점에서 삶의 방식의 차이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할 지점이 있는 듯합니다.
2-2.중세인들의 망탈리테와 감수성을 지배하고 태도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불안감인데, 불안은 동시에 도덕적이며, ‘악마에게 저주받을 위험’, ‘구원 받지 못할 것에 대한 공포’가 중세인의 감수성과 태도를 결정했습니다. 그렇기에, 중세 시대에는 오래된 권위인 성경에 의지했으며, 교회는 새로운 것을 금하는데 열성적이었는데요, 중세인들이 어떤 사물을 믿는데는 비상한 것들을 통해서인데, 교황과 성인 같은 존재들은 기적을 벌여 영웅이 되고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그런 시대(도덕적, 공포, 불안, 의존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시대)에 색과 육체의 매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반전이 있는데, ‘불안감’과 ‘도덕적’인 시대와 함께 근대적 사랑- 궁정식 사랑으로 영혼과 육체, 마음과 정신, 성과 감정 사이의 믿기지 않을 정도의 균형을 추구했다는 점과 육체와 몸짓을 중요시했다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전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감수성도 있고, 중세만의 감수성도 있었던 듯합니다. 현대의 지배적인 감수성에 젖어있는지, 중세의 감수성을 유추해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금의 지배적인 감수성에서 조금씩 벗어나 또다른 시대의 감수성으로 순례(?)를 할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한 주의 중간쯤 만나는 우리 세미나 선생님들~❤️ 저는 피곤에 쩔어 눈도 겨우 뜨고 앉아있을 때가 꽤나 있는데요~ 그러다가 세미나 끝날 때는 힘을 받고 들어가요~ 이번주도 그랬습니다. 감사해요~❤️
봉건제와 장원제도에 의해 공동체와 강한 유대관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삶을 중세시대의 특징으로 생각했었는데요.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휴고의 읽기를 보여주면서 이반일리치는 '새로운 자아'를 언급하지요. 저도 이 부분이 낯설었는데요. 12세기에 책을 읽는 이, '학자'에게 '망명자', '순례자'의 의미를 부여한 이 '자아'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 더 알아가고 싶네요.
저는 규문에 오면 중세에 와 있는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같이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밥을 같이 먹고 수다도 떨고 요가도 하고.. ㅋㅋㅋ 여기에서 내 자신을 유배시켜 책의 페이지를 통과하는 순례를 하며 내가 걷는 어느 길에서도 자기 자신에게 자아를 드러내는 빛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순례자가 되고 싶네요.. 고정되지 않은 위치에서 항상 길위에서 지혜를 얻고자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순례자.. 즐거운(?) 중세 공부를 통과하는 길에 함께 해요! 영아쌤의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