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기인식으로서의 공부
“후고는 독자에게 페이지에서 발산하는 빛에 자신을 드러내라고, 그리하여 자신을 인식하라고, 자신의 자아를 인정하라고 권한다. 페이지를 밝히는 지혜의 빛을 받을 때 읽는 사람의 자아에 불이 붙을 것이며, 그 빛 속에서 읽는 사람은 자신을 인식할 것이다.”(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 현암사, 43쪽)
성 빅토르 후고에게 읽기란 페이지가 발하는 빛에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 그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아’ 또는 ‘개인’이라는 개념은 12세기의 발명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아를 당연시하지만 따지고 보면 굉장히 모호하고 까다로운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부모가 누구인지, 나의 신분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고 대하는지, 내가 속한 장소가 어디인지 ……. 이런 것들과 일정정도 분리된, 일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나’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는 감각은 역사적으로 매우 독특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리치는 우리 시대가 망명자들의 세상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12세기에 자아는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막 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순례자와 십자군, 떠돌이 석공과 방앗간 수리공, 거지와 유물 도둑, 음유시인과 방랑하는 학자”(40쪽)가 12세기에는 길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르 고프에 따르면) 고대의 철학자와도 다르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와도 다른 중세의 지식인이 이 시기에 탄생하기도 했지요. 이들은 자기 동네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부터 떠나는 과정에서 “미리 결정된 봉건적 오르도ordo 안에서 그들을 지탱하고 구속했던 유대 없이도”(40쪽)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에게 자아는 망명의 경험으로부터, 위험과 고독 속에서 어렵게 발견되는 무엇이었던 거겠죠.
그렇다면 페이지에서 자아를 발견한다는 건 뭘까요?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를 이루는 외적 조건을 뛰어넘는 경험을 합니다. 계급, 인종, 시대, 성별 등 ‘나’를 이루는 외부적 요소들을 넘어 낯선 사유와 접속하는 일이 일어나지요. 예를 들어 최근 청지밴드에서 『망명과 자긍심』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저자인 일라이 클레어는 미국에 사는 백인이고, 시골 노동계급 출신의 레즈비언이고, 페미니스트이자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는 장애인입니다. 저와는 프로필 상으로 겹치는 바가 거의 없네요. 그런데도 저는 이 저자가 말하는 것들을 ‘느낍니다.’ 단순히 ‘저 사람은 저런 말 하는구나’하고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저의 기억을 다른 방식으로 구성하게 되기도 하고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감각이 달라지기도 하지요. 저와 공통된 조건을 공유하지 않는 누군가의 사유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미결정적인 상태로 존재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이루는 조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지만, 또 그러한 조건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미묘한 긴장상태 속에 ‘자아’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히 순수한 자아가 고정된 상태로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며 존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자기 마을이나 신분, 기질 등등이 규정하는 바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페이지’가 중요합니다. 책은 우리가 대면관계에서 접하기 힘든 낯선 사유를 전해줍니다. 물론 지금은 이런 것들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읽기는 책과의 관계에서 자기 신체와 일상의 리듬을 변환시키는 과정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조금 다른 듯합니다. 여기에는 어쩔 수 없이 어떤 경건함이 포함되는 것 같고, 지식에 접근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환시킨다는 의미의 영성(푸코)이 함축되는 것 같습니다.
읽기를 ‘페이지의 빛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새롭게 정의하고 나면 읽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조금 달라질 것 같습니다. 읽기가 이런 것이라면 여기에는 자기 자신과 씨름하는 과정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쉽게 읽히는 책은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책일지도 모릅니다. 책 자체가 무조건 어렵고 난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읽기의 과정 중에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중세 공부는 요즘 제게 좋은 읽기의 경험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요일과 일요일 중세 역사, 중세 철학사 공부를 하면서 신이란 무엇이고 신이 죽었다는 건 무엇인지, 지식이란 무엇이고 자아란 무엇이며, 풍요란 무엇인지 질문하게 되네요.
2.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일 하는 자
“사람들이 하나라고 믿는 신의 집은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의 세 부류로 나뉜다. 공존하는 이 세 집단은 분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 편의 봉사는 다른 두 편의 활동 조건이 된다. 각자는 전체를 도울 책임을 지고 있다. 따라서 이 같은 3분적인 집합체는 아무튼 통합되게 마련이며, 그래서 법이 승리하고 세계가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아달베롱 드 랑)
기독교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는 조르주 뒤메질이 말한 3분 기능체제를 따릅니다. 성직자, 농부, 전사. 기도하는 사람oratores, 일하는 사람laboratores, 싸우는 사람bellatores. 양, 소, 개. 1000년 무렵 서양의 문헌은 이 새로운 체계에 따라 기독교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뒤메질은 이러한 체계가 인도-유럽어계 사회의 공통된 특징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학자들은 이 기능적 3분 체계가 “모든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발전에서 나타나는 필수 단계”(424쪽)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론 서양 중세에 이러한 체계가 성립되는 것은 실제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귀족이 전사계급으로 편성되고, 성직자들이 특권계급으로 변모하고, 농민들의 조건이 농노의 수준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거치며 역사 속에 이 체계는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3분 체계에 무언가 근본적인 점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든 스스로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성직자, 전사, 농민으로 대표되는 세 가지 역량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비전을 제시하고 담론을 만들고 하는 차원과,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여러 가지 위험으로부터 집단을 보호하는 차원, 그리고 그 집단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돌보는 살림의 차원. 그런데 이 각각의 차원들(혹은 역량들)은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고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가령 살림과 돌봄을 도외시하고 정신적이고 이론적인 것에만 몰두한다면, 사유와 담론 자체가 공허해져버리겠죠. 그러니까 세 기능들은 서로를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와 맺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 차원이 어떤 중심을 가지고 합성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사회와 집단의 형태가 출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집단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이 세 차원, 세 가지 역량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중세 사회는 신분에 따른 위계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이 3분 체제는 사실상 성직자와 전사 계급이 농민 계급을 착취하는 형태를 취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3분 기능체계에 대한 중세인들의 담론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중세인들은 특권 계급이든 하층 계급이든 간에 스스로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존재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는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아달베롱 드 랑은 ‘한 편의 봉사는 다른 두 편의 활동 조건이 된다’라고 말합니다. 반면 우리의 감각은 어떨까요? 우리는 나를 살리는 것이 나와는 다른 존재들,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감각을 거의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삶은 각자가 해쳐나가야 하는 것이고, 나를 살리는 것은 다른 존재들이 아니라 나의 수입, 나의 능력, 나의 지식이죠. 그런데 이것은 정말 자명한 사실일까요?
3. 신체와 영성
“육체는 중세 사회에서 주요한 표현 수단 중 하나였다. (…) 중세 문명은 몸짓의 문명이다. 중세 사회에서 모든 중요한 계약과 서약에는 몸짓이 수반되었고, 또 그것에 의해 가시화되었다. 봉신은 영주의 손에 자기의 손을 넣고 이것을 성경에 얹어놓는다. 그리고 계약을 파기할 때는 지푸라기를 잘라버리거나 장갑을 팽개친다. 몸짓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사람들을 어떤 것에 참여케 했다. 몸짓은 제의에서 더욱더 중요했다. 성호는 신앙의 몸짓이다. 손을 합장하는 행위, 손을 쳐드는 행위, 손을 십자가형으로 꼬는 행위, 손을 감추는 행위 등은 모두 기도의 몸짓이다. (…) 성사의 시행은 몇 가지 몸짓으로 절정에 이른다. 미사의 거행은 바로 일련의 몸짓이다.”(자크 르 고프, 『서양 중세 문명』, 문학과지성사, 587쪽)
마지막 부분에서 르 고프는 중세의 망탈리테(심성)에 대해 여러 가지 사항들을 나열합니다. 중세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깨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저는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중첩”(552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중세인들에게 “개개 물질적 대상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자신과 일치하는 어떤 것의 표상으로 간주”(545쪽) 되었습니다. 중세의 세계는 추상의 세계였습니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은 신성한 세계, 구원의 약속으로서의 숨은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고자 했습니다. “사고는 숨은 의미의 영속적 발견”이며 “이데아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를 찾는 것”(546쪽)이었습니다. 언어는 상징이자 상징을 해독하기 위한 열쇠였고, 자연은 상징의 가장 큰 보고였으며, 이러한 상징적 사고는 교회 의례나 종교적 건축에 실제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세인들이 ‘추상적인 세계’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 그들이 구체적이고 실재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도외시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중세인들은 “한편으로는 감각적인 구체의 배후에서 보다 실재적인 추상을 찾아내고자 열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숨겨진 실재를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나게 하려고 노력”(552쪽) 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위에 인용한 ‘몸짓’에 관한 구절에 나타납니다. 그들은 단순히 저편의 세계를 몽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 안에서 경험하고자 했고, 이런 두 가지 움직임 사이에서 그들의 일상은 의미의 풍요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영혼의 구원을 꿈꾸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을 아무렇게나 해도 좋은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몸짓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중세인들은 영적인 의미들을 구체적인 몸짓들 속에서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반면 우리는 어느 때보다 세속적인 세상을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는 『중세의 지식인들』을 1부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1부 전반부 발제는 제가 후반부 발제는 경희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간식은 미현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이상하게 책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는 감각을 일으키곤 하는데요.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 어려워서일까요? 읽다보면 괜히 홀리해지고 에너지와 같은 뭔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겠지요. ^^ 중세의 공부를 열어 준 귀한 책 '서양중세문명' 세미나가 끝났네요. 중세라는 시대가 근대와 엮이면서 사유가 더 촘촘해지고, '자기를 인식'할 수 있는 공부가 되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