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에 담긴 읽기와 떠돌이 지식인
중세의 감각을 익혀보기 위한 우리의 실험 <텍스트의 포도밭> 읽기는 한고랑 한고랑이 참 쉽지 않은데, 특히 이번 2장에 다루고 있는 기억의 기술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어렵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과연 일리치가 일군 포도밭에서 텍스트 나무에 달려있는 포도를 잘 따먹을 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가 세미나 첫부분에 이 책을 소리내며 읽는 시간에 집중해 보았는데요. 기본적으로 우리는 왜 함께 소리를 내며 읽어보려고 할까?하는 질문이 들었구요. 같은 텍스트를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다는 게 내가 눈으로 텍스트를 읽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각자 다른 소리로 담아내는 텍스트는 내가 눈으로 읽는 텍스트와는 다른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우선 함께 모인 시공간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시종 눈앞에 보이는 은행나무와 바람을 쳐다보며 듣다가 종종 딴생각을 좀 하곤 했습니다.^^;) 저는 보통 책을 회사의 책상, 내 침대위에서 읽곤 하는데요. 그때 읽는 텍스트는 내 안으로 먹어들어가는, 잠식되어가는, 점점 가라앉다가 개중에 떠있는 것들만 들고 어떻게든 이해보려고 씨름하곤 합니다. 그런데 함께
목소리를 들으며 읽을때는 단지 텍스트에만 집중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하는 억지의 힘이 덜 들어가는 겁니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담긴 텍스트를 듣는 거지요. 그 목소리에는 텍스트를 이해해내려는 혹은 또박또박 읽어내는 각자의 사력으로 한자한자에서 튀어오르는
소리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텍스트를 이해하려고만 하는 힘의 한방향이 함께 읽으면 여러 방향으로 뻗어가는 텍스트의
잠재적인 힘도 느낍니다. 그 힘을 이용하여 어딘가로 다가가려는
몸짓이 읽기로 표현될 수 있다고도 생각되었습니다. 텍스트를 어떻게 만나느냐는 내가 텍스트를 이해하느냐의 문제만으로 만족되지 않고 함께 하는 목소리로 들어 이해하려 하고 그때 그 시공간을 느끼는 등의 방법으로 시도될때 '
체화'라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책을 읽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당시 수도사들이나 지식인들이 읽는 방식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보통 저는 책을 어떤 목적을 두고 읽는다든지(세미나, 모임등) , 시간을 때운다든지(출퇴근, 잠자기전등) 아니면 호기심이 생겨서 읽는다든지 하여 딱히 어떤 특정한 기술을 요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문자만 익힌다면 읽는다는 건 시간과 책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중세에 읽기는 스킬의 영역으로도 확장되어 정교한 기억 훈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기억의 기술로 읽기의 기술을 익히고 기억의 기술이 없이는 읽기의 기술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가령, 이
기억 훈련은 내면화된 읽기 기술을 강조하는데, 연설가의 머릿속으로 '메모를 하는' 방법과 적당한 계기에 '그것을 읽어내는' 방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또한, 읽기 행위는 예배 행위가 되고, 그 중심에
육화된 지혜가 놓이게 된다는 건 단순한 문자 이해정도의 수준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문자 이전의 기억을 생각해 보면 문자로 사유하는 어떤 규칙이 체계화 되기 이전에 신과 만물이 이어지는 리듬의 구조로 사유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음유시인의 노래로 비유되곤 하는데요. "음향"적으로 관리되던 기억이 "시각"적으로 관리되는 언어로 출현한 것입니다. 소리와 그 형태에 대한 의식 사이를 창조적 구성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단순한 문자 해득으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다고 합니다. 확실한 건 읽는 다는 건 문자라는 중요한 도구 이외의 다른 여타의 요소가 반드시 훈련과 기술의 차원에서 요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세의 지식인 부류중에 주목할 만한 지식인의 집단을 '
골리아르'라고 합니다. 세미나 쌤 중에 골룸이 연상된다고 하셨는데 어쩌면 자연스럽게 맞닿는 이미지일 수도 있을 정도로 기이하다고 합니다. 골리아르 성직자들은 부랑자요, 방탕자요, 노래하는 시인이요, 떠돌이 풍각쟁이였다고 합니다. 이 도시 지식인들은 직업적으로 '도시'의 틀에서 세속 문화를 이끌고 여러 형태의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데요. 이들은 도시의 건설과 함께 인구의 급증과 상업의 재개등으로 봉건적 구조가 점차 해체되고 그 과정에서 생산되는 낙오자, 대담한 자, 불행한 자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도시라는 교차점에서 만나게 되는 12세기의 사회적 유동성의 산물로 출현합니다. 골리아르의 으뜸은 '
아벨바르'라는 인물로 '엘로이즈'와 사랑도 하고 아이도 낳고 철저히 세속의 삶에서 지식을 연마하는 과정을 겪었다고 합니다. 사제, 성직자들에게도 육신의 쾌락을 누릴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12세기 지식인의 '인간주의'가 현재까지 우리가 거쳐온 다양한 '
인간주의'의 개념과는 각각 어떻게 다른 것인지 얘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인본주의', '인문주의', '인간중심주의' 등으로 여러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마다 크게 대두되는 것은 우주속에서 인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총체적인 전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했고 그리하여 동시대에도 이것들이 어떻게 변용되어야 하는지의 논의는 계속 진행중입니다. 그와중에 발현된 포스트 휴머니즘, 포스트 휴먼지식등은 지난 시간에도 크게 다루었듯이, 인간을 넘어서는 관점과 그에 따르는 지식이 어쩌면 중세에서 다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이 시대에서 사유할 수 없는 망탈리테를 그 시대에는 어떻게 구성되었는 지 좀더 들여다 보는 시간으로 그 시대에 대해 계속 궁금해지기도 합니다.(물론, 그 감각을 사유하기란 근대의 감각으로 똥똘 뭉친 저에겐 아주 많이 어렵지만요) 또한 중세에서 떠돌이 지식인으로 불리우는 골리아르가 우리의 시대에는 어떤 '
포스트 골리아르'가 필요한지 더 생각해 봄직하다는 여운이 남았습니다.
"우리에겐 어떤 '포스트 골리아르'가 필요할까?" 재밌는 질문이네요 ㅎㅎ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이 망명을 자처하는 자라고 했는데... 뭔가 떠돌이 골리아르들과 연관이 있지 않을지.
후기 잘 읽었습니다!
짝짝짝~~!!휵샘덕에 복습 야무지게 하네요. 유랑하는 생계형 지식인의 출현. 수도원의 순수지식과 골리아르의 세속적 지식의 대결이 팽팽했던 12세기가 일리치가 말한대로 분수령의 시기였다는 게 이해되네요. 13세기에 그런 역동성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부분을 읽으며 어쩐지 짠한 느낌도 들었고요. 아마도 골리아르들은 변신하여 점조직으로 존재하지 않을까요? ㅎㅎ
목소리에 담긴 지식인과 떠돌이 지식인 골리아르와 우리의 읽기에 대한 휵샘윽 후기 잘 읽었습니다. 아~후기란 이렇게 써야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재밌다는 생각도 덤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