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텍스트의 포도밭』 2장 ‘질서, 기억, 역사’를 끝까지 읽고 토론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챕터였는데요. 제가 이해한 것들을 최대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질서를 잡는다는 것’은 신이 창조 행위 때 확립한 그 우주적이고 상징적인 조화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질서를 잡는다’라는 것은 미리 생각한 주제에 따라 지식을 조직하거나 체계화하는 것도 아니고 지식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다. 읽는 사람의 질서가 이야기에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읽는 사람을 질서 안에 집어넣는다.”(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 현암사, 50쪽)
후고가 가르치는 읽기의 방법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서’입니다. 읽기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내면에 질서를 구축하는 활동입니다. 그런데 이때 질서란 단순히 이러저러한 지식들을 분류하는 자의적인 체계가 아니고, 신의 창조에 의해 확립된 우주적 질서를 의미합니다. “읽는 사람의 과제는 창세기부터 묵시록 사이의 이스토리아(역사) 가운데 자신이 읽는 모든 것을 그것이 속하는 각각의 지점에 집어넣는 것”(53쪽)입니다.
질서가 주어져 있다는 감각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로서는 잘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니체는 자연에 인간적인 표상을 덧씌우는 것을 경계하면서, “이 세계의 전체적 성격은 영원한 카오스”(니체, 『즐거운 학문』, 책세상, 184쪽)라고 말합니다. 이는 무작위적이거나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모방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우주는 언제나 인간이 질서라고 부르는 것과 무질서라고 부르는 것,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과 예외라고 부르는 것을 가로지르고 넘쳐흐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자연인데 인간은 자신이 인간적 유용성에 따라 만들어낸 관념들을 가지고 자연에 질서니 무질서니 하는 이미지를 투사합니다. 자신의 기대나 예측을 벗어나는 것들을 외면하거나 심판할 준비를 하고서.
니체의 관점에서 후고가 말하는 ‘우주적이고 상징적인 질서’라는 것은 거대한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지 환상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후고에게 있어서 ‘우주적 질서’가 의미하는 바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 나름의 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심오한 세계관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후고는 ‘어떤 것도 낮추어 보지 마라’라고 말하면서 책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이나 관찰 등을 통해 알게 되는 모든 것들을 신성하고 상징적인 질서 안에 위치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그는 현악기를 연주하며 음의 미세한 차이를 관찰하고, 등변 평행사변혀의 두 변을 곱했을 때 직사각형과 같은 면적이 나오는지를 두 도형을 발로 걸어다니며 직접 재서 알아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후고에게 ‘질서’의 관념은 인간의 관념을 자연에 투사하는 맹목성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 고유한 위치 속에서 파악하려는 세심한 노력을 함축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만물은 잉태 중’이라는 감각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돌 조각 하나에도 신성한 질서가 내포되어 있고, 그 어떤 앎도 그 너머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
이러한 관점에서 읽기란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일 이상을 의미합니다. 후고에게 읽기란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우주적 질서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후고에게 “기억 기술은 읽기 기술과 밀접하게 얽혀”(67쪽)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기억이란 날아다니는 말을 시각적으로 붙들어 기억 속에 저장하는 일과 미묘하게 다릅니다. 후고에게 기억이란 지식을 저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 안에서 지식에 맥락을 부여하고, 이러저러한 앎들을 서로 연관 짓고, 그 과정을 통해 자구적 의미 너머의 어떤 근본적인 통찰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읽는다는 게 단지 글자를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읽어도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책들을 힘들게 읽어나갈 때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제게는 특히 니체의 아포리즘들이 그랬고, 스피노자의 『윤리학』도 그랬고 푸코의 책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일단 이런 책들은 ‘읽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젖어들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그냥 논리를 따라가거나 개념을 파악하거나 보조자료를 찾아보는 것만으로는 ‘젖어들기’가 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우리의 상식으로부터 달아난 사유들이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머리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느끼는 방식이 달라져야 하지요. 그런데 느낌이 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듭니다. 그 시간 동안 소화되지 않은 앎을 품고 있어야 하죠. 그리고 이렇게 품고 있는 동안 그것을 다른 경험들과 연관시키게 되고, 조금씩 텍스트의 언어들이 입에 익고 몸에 익게 됩니다.
저는 어려운 철학책을 읽는 동안 우리가 별 수 없이 하게 되는 이런 경험에 후고가 제안하는 경건한 읽기와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텍스트를 단순히 정보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품는다는 점에서도 비슷하고요. 또 후고가 읽는 동안 이야기가 자신을 질서에 집어넣도록 하는 것처럼, 우리도 낯선 사유가 우리를 끌어당기고 우리의 감각을 변형시키기를 기다린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제가 좀 무리하게 유사성을 강조한 것 같기도 하네요. 어쨌든 후고 식의 읽기는 빠르게 핵심에 도달하려는 조급증을 내려놓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후고의 관점에선 요점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부터 얻은 지식을 몸에 익히고 섬세하게 거르고 신중하게 배열하는 것이 지혜에 이르는 길이니까요. 읽어야 할 텍스트에 둘러싸여 마음이 산란해질 때면 후고를 생각해야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텍스트의 포도밭』을 3장까지, 『중세의 지식인들』을 끝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중세의 지식인들』 발제는 영아샘과 승현샘께서 맡아주셨고, 간식은 미현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샘, 샘의 공부에 대한 공부를 향한 마음이 스며들어 있는 후기로 제게는 읽혔습니다. 푸코의 글이 일리치의 글이 그리고 니체의 문장이 어느날 환하게 '이해'될 때, 외부의 승인이 없이도 자기 자신에게 이해를 승인받을 때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아마도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먹을 때 포도즙으로 흠뻑 져셔지는 감각을 그렇게 표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읽기가 머리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차원을 넘어 신체를 변화시키는 차원으로 가기까지는 텍스트에 젖어들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뭔가를 처리할 것들에 둘러싸여 '마음이 산란할 때' 다시 텍스트의 물질성에 천착하기, 시작점을 잊지 않기. 함께 사유를 해주고 계신 샘들의 존재도 제게는 그 시작점입니다.
품기로서의 읽기. '품기'라는 인내. 삶의 자세가 읽기라는 공부와 연결되는 지점같습니다.
오늘 크크랩 세미나 할 때, 품기로서의 읽기 라는 말을 경희쌤께서 소개해주셨는데, 아름답네요~ 저도 실천해보겠어요~ 품기로서의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