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텍스트의 포도밭> 4장과 <수도원의 탄생> 1부 5장까지를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중세의 지식인들>을 읽을 때 저는 세속 지식인들의 모습에 매혹되었는데, <수도원의 탄생>과 <텍스트의 포도밭>을 함께 읽으니 또 수도사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네요.
“그들이 비겁했거나 공동체 생활에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독한 생활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에 대한 묵상에 보다 깊이 몰두하려는 소망 때문에 고독한 생활을 선택했다. (...) 사막의 수도자들은 사막에서 심리전이 더욱 치열해진다는 점과 악마의 공격이 가장 맹렬한 곳에 바로 사막이라는 점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크리스토퍼 브룩, <수도원의 탄생>, 청년사, 30쪽)
어원을 보면 수도사란 ‘홀로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집트 사막에서 생활한 최초의 수도자들은 은수자들이거나 독수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수도원 안에서 생활하는 수도사들의 공동체도 이른 시기에 탄생하기는 했지만요. 저는 위의 인용문을 보면서, 수도사들의 삶이란 어떤 것일지 궁금해졌습니다. 인용된 구절을 읽으며 저는 세속을 떠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죄’를 피해서 속세를 떠난 걸까요? 우리가 ‘디톡스’를 위해 템플스테이를 하듯이, 번다한 삶을 피해서 영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찾아 떠난 걸까요?
크리스토퍼 브룩은 오히려 사막에서 번뇌가 더욱 강렬하고 내면의 투쟁이 더욱 치열해진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 것 같습니다. 문명사회에서의 삶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외적 자극들이 존재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도피처가 되기도 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한 분주한 삶은 번뇌를 만들지만 또 번뇌를 잊어버릴 계기들을 무한히 제공합니다. 그런데 조금 위태롭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식의 망각과 회피가 우리에게 안정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삶을 ‘문제화’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도록 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반면 수도사들은 번뇌를 마주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사막의 은수자들과 독수자들의 삶은 평온하고 성스럽기는커녕, 악착같고 처절하고 광기에 근접해 있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플로베르의 <성 앙투안느의 유혹>도 사막의 은수자를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혹당하는 자’로 그리고 있지요. 그런데 토론 중 우리가 얘기했던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중세의 수도사들과 같은 역할을 해줄 존재들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문명 속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와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존재들, 세속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다른 중력을 만들어내는 존재들. 어쩌면 우리가 영성과 함께 이런 존재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문명 속에 약간의 사막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 기질이나 사회적 규범 같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삶과 사유의 관성으로부터 비껴나 그에 대해 질문하고, 자기 실존에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는 어떤 여백을 혼자 또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공부가 아닐까 싶네요.
다음 시간에는 <텍스트의 포도밭>을 5장까지, <수도원의 탄생>을 10장까지 읽고 만납니다. 간식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