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데, 일정표를 보니 그날은 마침 간식 담당이기도 했어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지하철 1호선을 탔죠. 에어컨에 어찌나 빵빵하던지 살을 에는 추위가 엄습하는 겁니다. 냉동될 것 같아서 금정에서 서둘러 4호선으로 옮겨탔어요. 북적이기는 해도 사람들 체온으로 조금 살만한 기온이더군요. 혜화에서 간식을 장만해서 규문으로 가는데, 우산에, 간식 봉다리에 손이 모자랐습니다. 살면서 왕왕 겪는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경우죠. 땀은 나고 손을 모자라고 바지가랑이는 축축하게 감기고 운동화는 물이 새고...이럴 때 한숨과 함께 나오는 탄식, “뭔 영화(榮華)를 보겠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나오는 이런 탄식을 놀리듯이 “영화를 봐야 제맛인가? 이 모든 상황, 우리가 출몰하지 않으면 아예 없었을 순간들이 아닌가. 우리의 활동과 동시에 세계가 일어서네”하는 소리가 한편에서 들려옵니다. 분열증인가? 싶습니다. 아무튼 일리-리 8주차 세미나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줌이 연결되고, 남원에서 강릉에서 샘들이 접속하시고 갑자기 다리 관절에 문제가 생기신 미현샘도 줌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곧 몽골사막으로 여행가시는 영아샘과 일이 끝나자마자 달려오신 희욱샘, 셋이 앉아 우리가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을 낭송하는 장면. 돌아보니 한 편의 영화를 찍은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은 5장 ‘학자식 읽기’ 후반부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부분이 우리의 오해가 집중되어 있는 장이고 그래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객관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먼저 오해가 집중된다는 의미를 풀어보자면, 우리에게 책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태어나보니 책이 있고 인간은 책을 읽는다는 의심 없는 단정. 그런데 일리치는 그런 믿음이 실로 역사적으로 구축된 믿음이라는 것을 짚고 있습니다. 책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자명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죠. 중세 12세기만 해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수사들이었고, 그들에게 읽기는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수사식 읽기의 모델이 삶의 모델이 되었던 시대는 ‘문맹’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였죠.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수사들이 묵상적 읽기를 전담하던 후고 시대까지만 해도 '문맹'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알파벳이라는 도구가 라틴어에만 구속되어 있던 시대에는 수도원의 수사들의 일상어가 라틴어였고 이들이 읽는 페이지도 라틴어였습니다. 라틴어로 된 페이지에는 성경과 교부들, 현자들의 말이 기록되어있었고요. 수사들은 이 페이지를 몸으로 소리 내어 읽으며 그 페이지의 지혜를 체화시켜나갔던 것이죠. 수사들의 지혜를 향한 읽기는 ‘모두를 위한’ 읽기였습니다. 왜 ‘모두를 위한’ 읽기였을까요? 이들에게 읽기는 ‘지혜를 향한’ 열정으로 스스로 ‘영적 망명자’가 되기로 선택한 삶의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능도 하지 않고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모범적인 읽는 사람들에 의해 교화된, 그래서 그들을 자유롭게 흉내내는 사람들을 위한 생활 방식”(135쪽)으로서의 읽기. 따라서 그런 생활 방식에 의한 수도원의 ‘종(bell)’소리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질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 것은 읽기를 수사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문맹’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읽는다는 것을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알파벳이라는 도구가 라틴어를 표기하는 것에만 쓰이다가 여러 토착어들을 표기하는 도구가 되면서 역설적으로 ‘문맹’이라는 개념이 출현하게 된다고 하는데요. 그 시기가 대략 후고의 수사식 읽기가 막을 내리는 12세기 후반 즈음이라는 것입니다. 일리치는 수사식 읽기가 학자식 읽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자그마한 변화들과 그 실천들을 주목하는데, 그것이 12세기 후반의 읽기와 쓰기에 도입된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이죠. 그 테크놀로지 가운데 지금의 시각에서 보자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테크닉이 ‘단어들 사이에 여백을 집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수도원의 필사실은 시끄러운 곳이었죠. 수사들이 읽던 밭이랑 같던 글월들에 띄어쓰기가 도입된 것은 7세기, 아일랜드에서 행해지던 그 테크닉이 도입되면서 필사실이 조용해졌다는 대목은 우리에게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요. 일리치는 “역사가들은 12세기 읽기의 현상학적 단절을 관찰하면서 페이지의 소리 나는 교류에서 소리 없는 교류로 이행하며 일어난 일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136쪽)고 합니다. 단어들 사이에 여백을 집어넣는 것이 읽고 쓰기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아마도 점차 필사실에서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후고의 시대 수사들이 읽던 페이지와는 전혀 다른 테크닉이 첨가되었겠죠. 편리하게 읽을 수 있는 여러 테크닉들 말입니다. 색인, 본문과 주석의 글자크기의 차이라던가 글의 특별한 배치 같은 레이아웃을 관리감독하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이체 책을 만들고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특권화되기 시작했을 겁니다.
“기도를 하며 지혜를 탐색하는 수사의 생활 방식은 보편적 읽고 쓰기의 모델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학자 같은 성직자의 생활방식이 모델이 평신도가 지향해야 할 모델이 되었으며, 그들은 이 모델에 의해 불가피하게 ‘문맹’으로 전락하여, 그들보더 나은 사람의 가르침과 통제를 받아야 했다.”(135쪽)
일리치는 이를 새로운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묵상적 읽기를 전담하던 수사와 일반인들의 차이가 존재했다면 이제는 수사적 읽기 방식은 구식이 되고, 문자를 독점한 서기, 즉 학자식 읽기를 하는 사람들과 그 기록을 듣기만 하는 평신도로 재배치되는 상황으로 이행하게 되었다는 의미이지요. 이상이 이번 주 우리가 읽은 학자식 읽기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외 <수도원의 탄생>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간단히 요약하자면 12세기 이후 수녀원의 탄생과 더불어 13세기 탁발 수도회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수녀원은 당시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귀족이나 왕족 여성들의 수도 열정이 대단했고 재정적인 차원에서 이들 여성들의 활약이 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영주들이나 왕의 입장에서는 수도사들을 키우는 수도원을 지원하는 편이 사회적인 유용성의 차원에서도 훨씬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수녀원이 세워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사람들에게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되는 분위기였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13세기 탁발 수도회는 심플하게 이야기하자면, 조직적인 종교활동보다 청빈과 절제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는 탁발 수도사의 삶이 당시 세속인들을 영적으로 감화시킬 수 있었던 양식이었다는 점입니다. 1220년까지 두 개의 탁발 수도회가 존재했는데,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프란체스코 수도회와 ‘설교자들의 스도회’-도미니크 수도회였죠. 수도생활의 역사에서 12세기가 수도사들과 참사회원들의 시대였다면, 13세기는 탁발 수도사들의 시대였다고 합니다.
이제 이번 시즌 우리가 읽기로 한 책이 한 권 남았습니다 <멜랑콜리의 색깔들-중세의 책과 사랑>입니다. 돌아오는 목요일 낭송할 부분은 <텍스트의 포도밭 6장> 이고요. 멜랑콜리-는133쪽까지 읽고 이야기 나눌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