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포도밭> 여섯 ‘말의 기록에서 생각의 기록으로’에서는 테크놀로지로서의 알파벳이 읽기 습관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후고의 세대 이전에 책은 저자의 말이나 구술의 기록이고 그랬기에 후고는 책에 주로 귀를 기울이고 행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들을 위해 읽기 기술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후고 이후의 세대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들에게 페이지에 있는 형태들은 개념의 시각장이 됩니다. 이제 포도밭, 정원, 모험적인 순례를 떠날 풍경으로서의 책 읽기(수사식 읽기)에서 보고(寶庫), 광산, 창고에 가까운, 판독할 수 있는 텍스트로서의 책 읽기(학자식 읽기)로 바뀐 것이죠.
이러한 읽기 방식의 변화에 있어서 알파벳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핵심어의 알파벳 순서에 따른 배치, 주제 색인, 소리 내지 않고 훑어보는 데 적합한 페이지 레이아웃 등이 변화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후고 이후에는 책에서 원하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고, 자신이 찾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서술의 흐름도 문단으로 나뉘고, 그 총합이 새로운 책을 구성됩니다.
이제 책은 지혜의 기록에서 지식의 기록이 되었고 새로운 테크닉을 이용하게 되면서 현실을 생각하는 새로운 방법을 갖게 됩니다. 서술된 현실이 목격자의 말보다 더 강해진 것이 이를 나타냅니다. 또 여백이나 행 사이에 붙었던 주석의 빈도가 줄고 주석은 지배적인 주 텍스트에 복속되었으며 레이아웃(선, 주석, 세밀화, 인용 등의 배치)의 배치를 통해 텍스트가 저자 자신이 주제를 고르고 저자 자신의 질서를 집어넣게 됩니다. 이러한 시각적 테크닉은 새로운 페이지 레이아웃, 장의 분할, 강조, 장과 절에 일관된 번호 매기기, 책 전체의 새로운 목차, 부제를 언급하는 장 서두의 요약, 머리말 등이 덧붙으면서 독자의 읽는 속도를 높여줍니다. 이러한 책 안의 질서는 저자의 의도를 더 잘 드러나게 만들고 책을 만드는 서기, 편찬자, 주석가와 다른 저자(자신의 말을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남의 자료를 붙이는 사람)의 과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이제 저자의 목소리와 생각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하는 책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책이 점점 휴대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뀌어갑니다. 이와 같은 페이지와 책의 형태, 저자의 탄생이 인간의 사고에 미친 영향을 인쇄의 영향보다 근본적이라고 후고는 말합니다.
후고 이후의 책의 페이지와 형태의 변화, 저자의 역할은 현대인에게는 너무 익숙한 것이어서 사고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인지, 어떻게 변화했다는 것인지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학자식 읽기 방식으로의 변화는 인간에게 짧은 시간 안에 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져다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책을 쓰는 저자의 역할도 중요해지게 되죠. 반면 학자식 읽기는 느리게, 곱씹어 가는 읽기 방식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일리치는 수사식 읽기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걸까요? 수많은 지식이 쏟아지고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학자식 읽기는 어쩌면 필연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제는 영상에 밀려 학자식 읽기마저도 외면 받는 세상이지만, <텍스트의 포도밭>을 보면서 깊이 읽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단편적으로 소비되는 지식을 얻기 위한 읽기가 아니라 곱씹어 소화하는 수사식 읽기를 통해 책과 만난다는 것은 어떤 감각일지 궁금해집니다. 모든 책이 아니라 몇 권의 책만이라도 수사식 읽기를 통해 책과 만나보고 싶네요.
<텍스트의 포도밭>은 12세기 수도사들의 읽기에 초점이 놓여 있다면 <멜랑콜리의 색깔들-중세의 책과 사랑>은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쓰인 책들의 위상, 중세에 향유된 문학작품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수태고지, 어머니, 이삭줍기 등의 상징적 의미들이 인상적이었다는 발제하신 샘들의 말씀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읽어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제가 소화가 잘 안 돼서 이렇게 후기를 마무리해야겠네요^^;
다음 시간은 <텍스트의 포도밭> 7장과 <멜랑콜리의 색깔들-중세의 책과 사랑> 끝까지입니다. 텍스트를 읽는 시간으로는 마지막이네요! 다음 시간에 뵐게요^^
수사식 읽기에서 학자식 읽기로 넘어오는 과정과 그 의미를 선명하게 정리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히 읽었습니다. 일리치는 어느 시대를 특권화하고 그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는 현실의 계보를 추적해 보여준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일리치나 푸코 같은 철학자의 텍스트는 그야말로 학자식 읽기로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텍스트인 것 같네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을 깨는만큼 이해가 되니까요.
우리 만나는거 오늘이네요~ 승현쌤 고마워요~🩶 조금후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