祭有祈焉, 有報焉, 有由辟焉. 제사에는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가 있고, 보답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가 있으며, 재앙과 환란을 그치게 하려고 지내는 제사가 있다. (<예기> 제11편 교특생 33번)
微生畝謂孔子曰, “丘何爲是栖栖者與? 無乃爲佞乎?” 孔子曰, “非敢爲佞也, 疾固也.” 미생묘(微生畝)가 공자께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도 연연해 하는가? 말을 잘하여 남의 환심(歡心)을 사려는 것이 아닌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제가 감히 말을 잘하여 남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고집불통(固執不通)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논어> <憲問第十四> 32번 )
이번에 읽은 <예기>는 교특생(郊特牲)편입니다. 교제사는 하늘에 제사드리는 것인데, 이때 한 마리의 소를 온전히 희생제물로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한 희생제물[特牲]'을 바친다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이 소가 특별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태뢰(太牢)라고 해서 따로 분류되고 길러진 소를 통째로 바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특별히 길러지지 않은, 관리가 덜 된(?) 소, 양, 돼지를 바쳤다면, 하늘에 드리는 교제는 특별히 엄선하여 대접받은 소를 제물로 바친 것이죠. 이와 관련해서는 <장자>에도 나옵니다. 수놓은 비단을 입고, 꼴과 콩을 먹으며, 밭일도 안 하고 떵떵거리며 살다가 막상 제물로 끌려갈 때 자기 신세를 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ㅋ. 두 번째는 이 특별한 소는 암수의 특징이 두드러지지 않은 송아지를 써서 정욕이 제사에 개입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다고 합니다. 같은 취지로 새끼를 밴 암소를 희생제물로 쓰지 않았고 천자는 그런 소를 먹지도 않았고요.
교제사와 함께 나오는 건 천자의 사제사입니다. 특별한 희생을 기르고 엄선하여 하늘에 드리는 교제사와 달리, 땅과 곡식의 신에게 드리는 제사는 매년 12월 만물을 모아서 여덟 신을 찾아 제향하는 것입니다. 여덟 신은 농업을 창시한 신, 백곡의 종자를 만든 신, 고대의 전관(田官)을 지낸 신, 농사에 이용되는 길을 담당한 신, 들쥐와 멧돼지를 잡아먹는 고양이와 범의 신, 제방의 신, 수로의 신입니다. 이에 걸맞는 제물을 준비하여 천자는 일 년 중 마지막 달에 한해의 농사가 잘 된 것이 만물의 도움 덕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보답합니다.
이렇게 정성들여 여러날에 걸쳐 제사를 지낼 시스템을 갖춘 것은, <예기>가 정착민의 텍스트라는 잘 보여줍니다. 농경을 하는 정착민은 자기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기>에 이렇게 제사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가 나오는 건 정기적으로 자신이 놓인 환경과 감응하는 의례를 통해 안정을 도모했기 때문이지요. 특히 만물을 모아서 제사지낸 사제사에 대한 설명을 보면, 인간이 자연에서 받고 있다는 것에 일일이 감사하고 보답해야 한다는 정성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보답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다음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이 계승이 끊어진다면 그만한 재앙이 없겠죠.
장례절차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있는 것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망자의 빈자리를 어떻게든 메꿔서 일상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유목민과 달리, 정착민은 누군가가 죽었다고 해서 사는 땅을 떠날 수 없으니까요. 오히려 유목민의 문화에서는 장례절차가 무척 간소합니다. 시신을 먼 곳에 두고 풍장 혹은 조장(鳥葬)하는 풍습이 있지요. 이번에 들은 신화 강의를 참조하자면, 유목민의 장례절차가 간소한 이유는 의외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척박한 환경에 노출된 사람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특별히 명예로운 생을 추구한다는 것이죠(이것이 유목민+전사문화). 그 결과 사람의 죽음 자체에는 큰 의미부여를 하거나 의례를 마련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정착민의 풍습은 공동체 단위를 유지하는 것이 개인의 명예나 특별한 삶보다 중시되기에, 누군가의 빈자리는 공동체 자체의 결여이기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고 승화시켜 공동체원들의 공허함을 없애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끔 구성됩니다. 이렇게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다뤄지는가 그 사회를 말해주는 지표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견실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 척박한 환경에 맞서 각자도생 중인지.
공자는 누구보다 견실한 공동체를 지향했고, 그게 깨져나가는 것이 안타까웠던 사람이죠. 그는 유별나게 예를 지켰기 때문에, 아첨한다, 연연해한다, 말 잘하는 것으로 한몫 챙기려 한다는 악담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 공자는 "고집불통을 싫어하기 때문에 연연해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고(固)는 경직된 사고방식이고, 어쩌면 이 사고방식은 가장 기초적인 상식의 모습을 할 수도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게 우선이라든가, 약소국은 강대국을 따라야 한다든가, 신분 높은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든가. 공자는 이런 인력 강한 상식에 반대하며, 예라는, 만물의 증여로 살아가고 관계를 벗어나면 살 수 없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을 계속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공자가 생각하는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요. 어떤 척박한 환경에 노출되더라도 각자도생의 극단으로 나아가지 않는.
다음 시간은
<논어> 편집본 30~33페이지
<예기> 中 217~259페이지
읽고 공통과제 써 옵니다.
그럼 토요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