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읽은 <예기>는 옥조(玉藻)편입니다. 옥조편은 어떻게 의관을 갖추고 장식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입니다. 옥조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천자는 오색끈에 옥을 꿰어 장식한 12개의 술이 앞뒤에 드리워져 깊숙하고 위에는 덮개가 있는 면류관을 쓰고, 용이 그려진 곤룡포를 입고서 종묘에 제사지낸다." 이렇게 보면 천자는 특정 혈통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자'라는 의관과 행위가 이루어지는 매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천자라는 개성이 그 사람에게 고유하게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기>에는 의관에 대한 촘촘한 의례가 나옵니다. 이는 그 사람의 고위함이 꼭 지위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고귀함은 지위의 고하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자신의 자리에 알맞는 의관과 장식과 행위를 갖추었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옷은 지금 시대에도 중요한 코드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옷은 내가 있는 시공을 구현하는 게 아닌 그냥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세계적으로 복식과 유행은 훨씬 고만고만하게 되었습니다. 개성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점점 그럴수록 의관만으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된 것이죠. <예기>의 주체성은 이와 달리 그 사람이 입고 먹고 행위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일리치가 <젠더>에서 말한 문화적 젠더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예기>가 정한 촘촘한 의관과 의례형식은 꽤 다층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얼마나 그 상황에 공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다른 이들의 공감과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지에 따라 취해야 할 태도나 행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공감의 깊이에 따라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정해지기도 하고요. 가령 같은 효자라 해도, 부모의 걱정을 덜 사기 위해 자식으로서 한 몸 건강하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방향이 있는가 하면, 부모의 손때 묻은 서책과 입김이 들어갔을 잔과 그릇에 차마 손대지 못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이는 규범의 차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그 시공에 감응하고 있는지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이런 '차마 못하는' 경우 한 두 가지로 군자와 소인의 차이가 생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공자는 재여가 1년상을 해도 되지 않냐고 했을 때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재여는 "군자가 3년간 예를 행하지 않으면 예가 무너진다"라는, 무척 상식적이고 효용만을 문제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공자에게 이 말은, 누군가의 빈자리가 산 사람에게 남긴 고통과 정서적 동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공감하지 못한 말이었죠. 이에 공자는 더는 3년상을 말하지 못합니다. 예는 자기가 있는 시공을 구현하는 것이자, 무엇보다 진심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은
<예기> 中 260~306p
<논어> 편집본 34~37p
읽고 공통과제 써 옵니다.
토요일에 만나요/
자기 자리에 알맞게 입고 행위를 갖추는 것이 고귀해지는 실천이라는 말이 와닿네요. 보통 개성이라 하고 사실은 요즘 유행하는 것을 따르기 때문인지, 개성과 최신 유행은 왠지 동일한 말 같아요. 이제 기업에서도 점점 양복을 입지 않고 자유 복장 추세이고, 옷차림이 그 사람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 없게 된 것은 분명하네요. 공자님은 때에 맞게 먹고 입으셨다는데, 이처럼 먹고 입는 일상안에서 자기 실천과 고민을 부단히 하는 것이 군자의 길이군요.^^ 소인은 옷장 가득한 옷을 보고도 '오늘은 뭐 입지?'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겠죠.
마지막 "예는 진심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도 마음에 새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