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에 이어 오늘도 눈이 옵니다! 인터뷰 날에 눈이 오면 세미나가 대박이 난다는 소문이?
풍성한 한 상을 준비(연출?) 해주신 지혜와 헤르메스 팀의 모습입니다!
1. 불교 공부를 지속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
채운: 지혜와 헤르메스 신청을 망설이시는 분들이 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이 공부를 하면 무엇이 좋을지 궁금해 하실 것 같아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궁금해하실 법한 것들을 제가 대신 질문하려고 해요. 두 분이 자연스럽게 답해주세요.
두 분이 한두 해동안 불교공부를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이 공부를 계속 해야겠다고 생각한 지점이 무엇인가요?
윤순:'고苦'와 관련해서는 삼고가 생각나요. 그 전에 저에게 고는 피해야 하는 것, 되도록 나에게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전혀 다른 접근을 하잖아요, 살아가는 바탕으로서의 고, 하지만 아무리 불교의 고에 대해 읽어도 지하철에서 마주친 덩치 크고 냄새나는 아저씨가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넘어가지지가 않더라고요. 아무리 불교의 통찰을 공부를 해도. 아직도 회피의 방향으로 밖에 생각을 못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삶의 바탕에 고가 있다는, 그 지점을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민호: 불교를 왜 계속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냐면,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수준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제가 부딪히는 사건, 사고들을조금 더 너그럽게 보게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채운: 너그럽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거죠?
민호: 속단하지 않고, 사건을 손쉽게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조금 더 큰 관점, 맥락 속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게 불교를 공부하면 할수록 드는 생각이에요.
채운: 그런데 그 부분은 정치, 경제, 사회학도 어떤 사건을 더 큰 맥락에서 통찰하는 학문 아닌가요? 그것들과 불교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조금 더 독특한 지점을 얘기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채운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걸 보았다면 기분 탓일까요? 🙂
민호: 즉흥적으로 얘기하기에는 숙고가 필요한 부분이긴 한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지금 카메라도 있고...
채운: 아니, 얘네들은 방송국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쫄지 말고 얘기해 그냥.
민호: 갑자기... 질문을 이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채운: ㅋㅋ그럼 그건 넘어가고.
2. 불교 공부를 하며 답답했던 지점: 해석적 무능력
채운:두 분이 불교 공부하면서 답답했던 지점이 있나요? 고전일수록 그 언어 속에서 맴도는 게 있어요. 옛날 언어, 옛날 사유이다 보니까. 더군다나 불교나 기독교는 독특한 자기만의 언어가 있잖아요. 불교를 공부하면서도 그것을 해석해내지 못하면 지금과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거든요.
민호: 불교 경전을 읽건 해설서를 읽건 해석이 너무 고루하다고 느낀 부분이 있었어요.
채운: 어떤 부분이 제일 그랬어?
민호:경전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요. 부처님이 마음을 돌보라고 하는 것도 자기 삶의 조건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불교가 혁명적일 수도 있지만, 부르주아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주어진 조건 안에서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방법을 제시하여 그 상황에 안주하게 하는 쪽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시야를 좁게 만들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저는 불교를 공부할 때 마음의 처방 뿐 아니라 불교가 기반으로 하는 존재론이나 물질론을 현대적인 언어로 폭 넓게 풀어보고 싶은 생각이 늘 있었어요.
채운: 그러니까 이를테면 ‘마음을 보아라’ 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해석해서 마음과 그 마음을 만들어낸 복잡한 메커니즘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곧이 곧대로 자기 마음에만 고착되는 폐단?
민호: 그렇죠. 그러니까 마음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시대의 조건은 무엇이며, 어디에 뿌리내린 마음인지와 같은 문제들이 계속해서 고민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어떤 바운더리 안에서 편안함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만 갈 때 힘이 빠지는 것 같아요. 불교가 기복 신앙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힐링의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기도 한데요. 저는 불교의 잠재력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불교는 자기 관점을 바꾸고 자기 위치를 바꾸는 일이 필요한데, 그 반대 방향으로 갈 때 답답한 것 같아요.
채운: 불경에 대한 해석적 무능력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거지?
민호: 네.
채운: 선생님은 어떠셨어요?
윤순: 두 가지 경전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환상적인 이야기로 이루어진 경전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똑같은 말을 조금씩 바꾸면서 반복하는 듯한 논서 같은 경전이 있어요. 두가지의 경전을 읽고 두가지의 반발심이 올라왔었어요. 이야기로 이루어진 경전들에서는 제가 잡아낼 수 있는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휘발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논서 같은 경우에는 잘 모르니까 읽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제가 신심을 가지고 불교에 접근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당혹감도 있었고요. 그런데 티벳 역사, 달라이 라마의 역사와 함께 읽었을 때에는 훨씬 더 설득되는 느낌이었어요. 여러 가지가 종합되어서 경전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반발심이 협소한 견해에서 나오는 반발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채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을 보면 문헌학적 분석, 역사적 분석, 문학적 분석 등 다양한 방식으로 텍스트를 분석하는데, 그런 방식으로 읽으면 말씀의 맥락이 다른 각도로 깊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잖아요. 저는 불경도 그렇게 읽을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쭉 있었어요. 이번 학기에 읽을 디가니까야는 부처님이 설하신 말씀을 요약하지 않고 길게 담은 '장아함경'인데요. 부처님의 모든 말씀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걸 읽을 때, 말씀의 맥락, 상징과 문학적인 해석 등 여러 측면에서의 능동적 해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분이 느끼셨던 불경 해석의 무능력함. 유교 경전도 그렇고 불교 경전도 그렇고 모든 경전은 해석이 배타적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을 하면 안된다는 건 아니니까 각자의 문제의식 속에서 해석을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3.‘고苦’의 문제?
채운: 공지를 확인해보면 ‘고’의 문제를 고민한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욥기와 디가니까야를 읽으면서 ‘고’의 문제에 천착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민호: 불교를 겉핥기로나마 접하면서 알게 된 건 고의 문제가 정서적 차원에서나 가시적으로 직접 드러나는 고통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이나 태평하게 사는 사람들, 부유하고 건강하다 여겨지는 사람들, 심지어는 동물들조차도 고의 문제에 함께 들어와 있다는 것이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우리는 고통을 생각할 때 우리의 발밑만 생각하지만 언제나 그 범위에는 시간의 문제가 더해져야 하고, 시간의 문제가 더해진다는 건 지금 여기에 고통의 문제가 한정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게 보면 지금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 다른 시간,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비극이 지금의 자기와 분리되지 않는데, 이 생각을 하지 않으면 고통의 문제가 굉장히 납작해지는 것 같아요.
윤순: 고통에 대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나만 괜찮으면 남의 고통은 알 수 없다는 것이거든요. 그 수준에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불교공부를 하면서 느낀 건 보편적 고통은 없다는 것이에요. 똑같은 것을 겪게 된다고 하더라도 다르게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채운: 윤순샘이 이야기해주신 건 고통 자체보다 고통이 각각에게 어떤 의미의 차원에서 다가오는지를 이야기해주신 것 같아요. 저는 이게 우리가 올해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욥기에서도 고통을 말하고 부처님도 고통을 말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욥과 부처가 말하는 고통이 같은 의미일까요?같은 데에서 출발해서 결론만 다른 것일까 아니면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다른 것일까? 이 부분을 예민하게 보면서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윤순: 불교 공부하면서 평안이나 편안함, 마음의 평화로 향해 달리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것을 마음이 도달해야 하는 궁극적인 도착지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은 현재 고통들이 계속 따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재 고의 느낌이 없다면 평안을 묻지 않겠죠. 그렇게 보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개고도 이해가 돼요.
채운: 그런데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편안함을 부처님은 상정하지 않죠. 해탈을 고가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 고와 고가 아닌 것이 나뉘어져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니체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는 거죠. 수동적 허무주의, 도피처럼. 니체가 불교를 비판하는 지점이 일반적으로 불경 읽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길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일체개고의 문제를 번뇌가 없는 상태로 도달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읽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게 이 세미나의 목표예요. 해석해보시라는 거죠.
4. 불교와 기독교가 ‘고’를 바라보는 관점?
채운: 그럼 불경과 성경이 ‘고’를 바라보는 관점이 같은지, 그리고 둘 다 고를 넘어가는 차원을 이야기하는데 그 차원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제현: 저는 욥기가 더 친숙하니까 욥기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욥기에서는 ‘고’가 나쁜 것으로 제시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원인이 항상 '하나님'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회복시켜주실까라는 관점에서 고정된 채로 사건을 바라보잖아요. 그런데 니체는 고통을 가치 판단으로부터 벗어나서 바라보려고 하잖아요. 문제는 제가 아직까지는 고통을 가치 판단으로부터 벗어나서 받아들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와닿지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불교는 다른 토대 위에 있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고’라는 것이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인가, 가치 판단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들어요.
민호: 제현샘 질문에 대한 대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욥기에서는 고통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요. 욥이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했을 때 하나님은 대답을 하지 않으시거든요. 그리고 그 고통은 해결이 불가능한 고통이죠. 다른 신약이나 구약의 고통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도 아담 때부터 이어진 죄를 대신해 고통을 당하시기에 인과가 맞는데, 욥기에서는 인과가 풀리지 않은 채로 끝나거든요. 불교는 다른 뉘앙스인 것 같아요. 기독교는 알 수도 물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면, 불교는 알려고 해야 알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 미묘한 같고도 다름을 섬세하게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5. 미셸 세르와 함께 읽는 이유?
채운: 그렇다면 욥기와 디가니까야만 읽어도 되는데 왜 세르를 왜 함께 읽으려고 하나요?세르와 라투르의 대화를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지점을 이야기해주세요.
윤순: 해명 맨 끝에 지혜라는 장이 있는데, 거기서 ‘고’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세르는 니체가 비도덕에서 도덕, 진리가 아닌 것에서 진리가 나왔다고 하는 것처럼, 지식 자체가 지식 아닌 데에서 나왔다고 해요. 지혜는 고통의 경험과 그 경험에서의 청취에서 생겨났다고 말해요. 지식이 고통, 밑바탕의 소음에서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연결되지 않는 걸 통합하는 세르의 작업의 밑바탕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고 읽었어요.
민호:저는 세르의 문제의식이 저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고통의 이야기는 고대에서부터 이어지지만 그걸 왜 들어야 하냐고 했을 때 세르는 우리가 인간 역사에서 이루어져왔던 폭력과 방황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이 시대를 건널 방법이 없다고 말해요. 왜냐하면 세르는 1930년에 태어나서 20세기의 나치즘, 2차 대전, 베트남 전쟁을 절절하게 겪었다고 스스로 이야기하는데, 그러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터진 핵을 보고 기술 때문에 우리의 생존조건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해요. 자연에 대한 통제권을 가졌지만 자신들의 통제권을 가지지는 못한다는 표현을 사용하면서요.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도덕은 올바름의 도덕이 아니라 살기 위한, 숨쉬기 위한 도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어떤 시대의 성인들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도덕이 더 크다고 얘기하면서, 그럼 대체 어떻게 도덕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를 물어요. 그러면서 지혜가 필요하다고 얘기해요. 그런데 그 지혜를 지금까지 유럽을 지탱해왔던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으로는 찾을 수 없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을 바탕으로 세워진 과학은 인간의 밑바탕에 있는 아픔과 신음과 악의 문제를 다 놓치고 있기 때문이에요. 마치 객관적인 언어인 것처럼 세계를 한 발 떨어져서 신의 관점으로 분성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밑바탕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 왔는지에 대한 질문이 없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지식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지식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서사시, 신화, 경전 속에 있는 인간의 아우성이 있고, 그 아우성들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두 개의 축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욥의 이야기를 포함해서 인간 역사의 취약한 면모들, 지저분한 면모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면서 고통의 문제에 중요성을 두고 있더라고요. 그게 너무 공감됐어요.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초해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지혜가 고통의 지혜라는 점이요.
채운:세르의 독특한 점은 전체성에 반대하고 있다는 거예요. 근대 이후로 우리가 가진 뿌리깊은 사고 중 하나가 부분의 합은 전체라는 생각이죠. 그런데 언제나 부분의 합은 전체와 같지 않아요. 부분에 앞선 '전체'라는 것 자체가 실은 관념이죠. 세르가 중요하게 보는 건 국지적인 영역 속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들이에요. 전체화할 수 없는 부분들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들이 어떻게 다른 물줄기를 바꾸는가. 세르는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요. 그래서 연결의 철학자라고도 하는데요. 세르가 이 세상에서 근본적이라고 여기는 건 여기와 저기 ‘사이’예요. 나와 너가 아니라 이 둘이 소통할 때 끼어드는 중간, 그걸 기식자라고 하죠. 규정되지 않은 소음들이 끊임없이 개입하죠. 고통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소음이기도 하고 존재론적으로는 기식자이기도 한. 고통의 극단에서는 고통스럽다고 말을 할 수가 없죠. 신음 밖에 할 수 없잖아. 그것에 어떻게 귀기울일까 했을 때 국지적인 차원에서의 연결의 실험들을 해야 하는데, 그런 존재들이 천사 혹은 헤르메스인 거죠. 고대의 경전에 나오는 '고'와 우리의 ‘고’사이에 다리를 놓는 방법을 세르에게서 배우면 어떨까. 그게 세르를 함께 읽는 이유 아닐까요? Simon & Garfunkeld의 노래, 'Bridge Over Troubled Water'가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