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운의 여시아독 강좌"는 현재의 인류학을 다루는 온라인 강좌입니다.
1. 왜 인류학인가요?
제현: 어떤 이유로 인류학 강좌를 기획하게 되셨나요?
채운: 인류학 강좌를 기획하게 된 것은 우선 제 공부의 방향성과 연관되어 있어요. 우선은 ‘축의 시대’라고 부르는 고대의 철학을 더 깊게 공부해서 어떻게든 제 언어로 풀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이런 시대를 돌파할 수 있는 지혜는 뭘까 등등을 생각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그 시대에 닿게 되거든요. 예를 들어 중국의 전국시대는 지금처럼 가치의 전환이 요구되는 혼란의 시대였죠.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인간의 탐욕이 극대화되면서 이전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새로운 생각들이 잡거하던 시대였는데, 구체적인 배치는 다르지만, 전 그 시대에 던져진 질문들이 지금 우리 시대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당시 인도라든가 그리스도 비슷하죠. 2500년이라는 거리 속에서 지금을 봤을 때 더 잘 보이는 것들도 있고요. 어떻게 자신의 시대를 읽어낼 것인가, 어떻게 나와 존재에 대해 질문할 것인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고대철학은 그런 질문들을 ‘지금 여기’에서 마주하도록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철학적 개념들은 아무래도 추상적이기 때문에, 다른 시대 혹은 같은 시대 다른 장소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실제로 세계를 느끼는 방식이나 구체적 삶의 양식들을 상상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먹는 것, 입는 것, 결혼, 육아, 주거... 궁극적으로는 죽음의 문제와 타자에 대한 인식 같은 것들에 대해 좀 다른 식으로 접근해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중 하나의 길이 인류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철학만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구체적인 삶의 지점들을 끄집어내고 이야기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요.
사실 인류학은 20세기의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학문이에요. 서양인들이 ‘타자’를 발견하면서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인식하게 되죠. 우리는 문명이고 그 밖의 것들은 야만이라는 식의 위계질서 속에서 유럽이 자기를 중심에 놓고 비유럽을 정복해 간 역사가 이른바 근대 역사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자기중심적 역사의 ‘바깥’에서 자신들이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을 되물었던 학문이 인류학인 거죠. 예를 들어 모스의 『증여론』은 서구인이 당연시하던 주고받음의 경제 원리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 관해 쓴 책이에요. 모스는 현지 조사를 한 건 아니고 여러 가지 보고서를 가지고 쓴 것이지만요. 그 뒤를 이어 레비스트로스가 등장하죠.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을 회의하고, 당연시되던 유럽적 삶의 양식들과 관계들을 되물었죠. ‘타자’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타자화했다고 할 수 있겠죠. 저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진짜 이상한 건 우리 자신 아닐까?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은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다’라는 사고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망상적인 것인가를 폭로했던 셈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히 ‘타자’가 될 수 없고, ‘나’를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우기는 건 오만이죠.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떠나 타자의 감각에 다가가려는 노력 속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인류학이 노정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기에 인류학의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인류학은 가치를 다양화해요. 중심을 탈중심화하죠. 제가 인류학 강좌를 시작한 두 번째 이유는 이 맥락과 연결됩니다.
고대철학을 공부하는 데 장애물이 있다면 바로 저 자신이에요. ‘근대+인간’이라는 저의 조건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저도 ‘근대적 가치’와 ‘인간적 가치’에 묶여 있음을 종종 발견합니다. ‘근대’와 ‘인간’의 테두리 안에서 고대의 사상을 단편적으로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가 있지요. 인류학은 ‘상상 밖의’ 다른 기준을 가진 삶과 역사와 이야기들을 통해 그런 허구적 중심성을 해체합니다. 그게 지금 제가 생각하는 인류학의 가능성이에요. '우리 근대인', '우리 인류'라는 동일자의 논리로는 이해불가능한 삶들과 존재방식들을 공부하면서 철학적 개념을 좀더 입체적으로, 풍부하게 생각해보자는 게 이 강좌를 기획한 이유라 하겠습니다.
다만, 이른바 인류학의 ‘고전’이라 여겨지는 책들이 아니라 제 문제의식과 공명한다고 느낀 동시대 연구자들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독해’하면서 저 외의 또 다른 ‘독자’들과 생각을 공유해보고 싶었습니다.
2. 강좌 진행 방식과 관련해서
제현: 인류학을 잘 몰라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 분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진행이 되는지 여쭤보고 싶어요.
채운: 거꾸로 제가 묻고 싶은데, 어떤 영화를 볼 때 이전의 영화를 하나도 안 보면 그 영화를 볼 수 없는 건 아니잖아요?^^ 영화가 뭔지, 영화의 문법이 뭔지를 전혀 모르더라도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가 뭔지 알게 되지요. 근데, 공부를 하려 하면 꼭 ‘선행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정말 이상합니다! 읽다 보니 알게 되는 거고, 읽다 보니 더 앞에 있었던 것도 궁금한 거죠. 그러니까 모스고 레비스트로스고 전혀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지금부터 뭐든 읽기 시작하면 돼요.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읽는 책이 나의 생각과 감정을 건드리는지 아닌지예요.
제가 이런 책들을 고른 이유는 그것이 저를 건드려주는 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학의 역사를 알고 싶다고 하는 분들께는 이 강좌가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존재하는 것들의 영역이 얼마나 다양한지, 그 모든 것들을 하나의 관점으로 아우르려는 태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알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저처럼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각자 읽고 와서, 소감과 질문을 나누고, 저는 저 나름대로의 해석을 나누는 거지만....
제현: 책을 다 읽지 않고 참여해도 괜찮은 거죠?
채운: 그럼요!^^ 하지만 한 달에 두 권 정도는 읽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오프 더 레코드 : 근데 책을 너무 안 읽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거 하는 시간 조금만 줄여도 읽을 수 있을 텐데... 버스 타고 오가는 시간에 읽어도 되고, 하다못해 맛집 줄서서라도 읽으려면 읽지 왜 못 읽어!! 맛난 음식 하나 먹겠다고 3~40분은 굳세게 기다리면서 꼭 책 읽으라 그러면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 불라불라....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래도, 정말 안 읽고 오셔도 괜찮습니다.ㅠ.ㅠ 책 읽고 오시면 너무 좋을 것 같지만 안 읽고 오셔도 괜찮습니다ㅠ.^
3. 인간 없는 인류학?
해민: 공지글에서 “인간 없는 인류학”이라는 말이 새롭게 다가왔어요. 그런데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 만나는 것을 인류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채운: 우리가 생각하는 인류학은 인류에 국한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미 인류세라는 규정이 화두인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인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아니라 ‘인류는 어떤 비인간 존재들과 함께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 것인가?’가 문제죠.
『숲은 생각한다』를 읽었을 때 저도 똑같은 의문이 들었어요. 이게 인류학인가? 그러다 ‘이게 인류학이다’로 생각이 바뀌었죠. 왜냐하면 인간은 한번도 인간 존재끼리 살아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물, 동물, 식물 등 ‘비인간’ 존재들이 이미 ‘인간’ 존재에 얽혀들어가 있어요. 그렇다면 인간만의 인류학은 사실 불가능한 거죠. 『맹자』를 보면 나무가 자라나는 시기에는 벌목을 금지하고, 물고기가 산란하는 시기에는 그물코의 크기를 크게 만들어 모조리 잡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걸 정치라고 말합니다. 이런 정치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이 비인간 존재와 더불어 살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죠. 인간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공부하는 건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만물의 마음과 삶을 공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인류학은 인류의 바깥, 혹은 인간의 ‘경계’ 자체를 문제삼을 수밖에 없어요. 현재의 인류학이 생태학, 페미니즘, 동물학, 양자역학, 예술, 기술철학 등과 접속하면서 확장되어가는 이유이기도 하죠.
4. 인간 너머를 사유한다는 것?
제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인간 너머를 사유한다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아서요. 인간 너머를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형이상학의 영역인 듯해 보이는 ‘인간 너머’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채운: 두 분도 읽으셨지만, 요즘 규문 여기저기서 읽는 『세계 끝의 버섯』이 그 예죠. 이 책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구체적이고도 미시적으로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어떻게 그 안에서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삶이 가능한지를 보여주죠. 곰팡이로부터 모든 것들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고찰하면서요. 이 강좌에서 읽을 책들도 다 그런 식의 구체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인류학의 강점이겠지요.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작동하는 세계로부터 독특한 규칙 내지는 작동방식을 끌어내죠. 구체적 지점에서 출발해서 우리를 미지의 길로 인도합니다.
4월에 읽을 책 중에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라는 책이 있어요. 아이우통 크레나키는 브라질의 인류학자인데요. 그 역시 이 폐허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요. ‘이생망’이라고 포기할 게 아니라 설령 망한 세계일지라도 여전히 ‘함께 산다’는 윤리를 버리지 말자는 거죠. 어떤 식으로든 한 사이클의 ‘끝’이 있겠지만, 중요한 건 끝이 아니라 그 끝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라는 얘깁니다. 어쨌든 막 살다가 죽을 수는 없잖아요?^^ 이게 강의록인데 청년들이 굉장한 관심과 공감을 보였다고 해요. 어차피 망했다고 생각하면 환멸이나 비관에 빠지기 쉽죠. 하지만 망할 때 망하더라도 다른 존재들에게 예의를 갖춰서 살아내고, 다른 존재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려 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삶을 살고 싶으신 분들과 함께 여시아독(나는 이렇게 읽었다)하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제현: 눈썹도 그리고, 생활 패턴도 바꾸고... 요새는 ‘인간’ 좀 되려고 하는데, ‘인간이 뭔가?’에 대해 훅! 질문하게 되네요! 타자에 대해 고민할 기회도, 책을 읽을 시간도 적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요새 참 필요한 강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서 더? 마음이 끌립니다 ㅋㅋ. 인터뷰 재미있게 마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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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허해민
촬영: 허해민
질문: 허해민, 문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