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우주에서 원자 속 전자들까지, 이번 주 저희가 읽고 떠들었던 스케일입니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처럼 굴던 이 책도 여느 과학책들처럼 수식과 낯선 용어들을 쏟아내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죠. 이번 책에서도 몇 가지 신기하고 흥미로운 단서 몇 조각만 얻어 가면 충분합니다.
특수와 일반 : 중력은 없다
간단하지 않지만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 사이에는 세 가지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1)공간의 평평함/휘어짐 2) 물체의 등속/가속 3) 중력의 순간적 전달/중력의 비존재. 특수 상대성 이론 앞에 ‘특수’가 붙은 것은 그 이론이 보편적인 상황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에 적용된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였습니다. 즉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블랙홀 앞에서나 지구에서나 시공간은 균질합니다. 시계도 똑같이 가지요. 다만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이유는 운동하는 속도 때문입니다. 속도가 높으면 시간은 느리게 흐리지요. 하지만 이 이론에서는 물체가 가속을 받아 점점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경우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력이 멀리 있는 물체에 ‘순간적으로’ 즉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작용하는 경우도 설명되지 않지요.
일반 상대성 이론은 시공간이 평평하지 않은 상황을 다룹니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문제들도 해결되지요. 시공간은 휘어있습니다. 블랙홀 주변은 심하게 휘어 있어서 시간이 느리게 흐릅니다. 그런데 시공이 휘어있다는 게 뭘까요? 저희는 트램펄린(방방)의 비유를 가지고 이야기해보았습니다. 방방에 저와 아기가 나란히 올라서 있다면, 측면에서 볼 때 패여 있는 정도가 다를 것입니다. 그 주변에 구슬들을 뿌리면 제 쪽으로 훨씬 더 많이 들어오겠죠. 옆에서 보면 구슬들은 파인 곳으로 떨어진(혹은 가라앉은)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보면 마치 저와 아기가 구슬들을 끌어당긴 것처럼 보이겠죠. 방방을 구부려 놓은 깊이(곡률)에 따라 멀리 있는 구슬까지 당겨옵니다. 이것이 중력입니다. 이처럼 휘어진 시공간에서는 더 이상 중력은 물체에 가해지거나 작용하는 힘이 아닙니다. 물체는 “질량-에너지에 의해 휘어진 시공간 곡면상에서 가장 짧은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면 이 최단 경로를 따르는 자유낙하에 의해 발생하는 가속은 중력의 ‘힘’에 의한 가속과 완전히 똑같다. (...) 이 이론의 핵심은 실질적으로 ‘중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22쪽) 중력은 물체에 소유된 실체적인 힘이 아닙니다. 중력은 시공간 곡면에 의한 운동의 효과를 편의상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일종의 시공간상 고도 차이 혹은 웅덩이들만이 있을 뿐 중력은 없습니다. 따라서 중력의 빛보다 빠른 전달 같은 것도 전혀 모순이 아닙니다.
정리하면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공간이 휘어져 있고, 그렇기에 중력 효과가 나타나며, 물체는 계속해서 가속되고 있습니다. 중력효과가 크게 나타나는 곳에서는 시간은 느리게 측정됩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물 행성에서의 1시간이 지구에서의 7년과 같은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저희는 그런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만약 블랙홀 근처에서 밖을 바라볼 수 있다면, 혹은 바깥을 찍는 cctv를 본다면 있다면, 생노병사를 순식간에 겪어가며 스러져가는 사람들의 모습, 나아가 산맥이 솟았다 꺼지고 바다가 열리고 닫히는 모습, 심지어는 별이 생기고 터지고 또 생기는 모습을 주마등처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가속팽창과 암흑에너지
중력(혹은 중력 효과)은 자연의 네 가지 힘들 중에 가장 약하지만 가장 먼 거리까지 미칩니다. “특이하게도 중력은 축적되지도 않고 굽혀지지도 않으며 오직 한 방향으로만 작용한다. 중력에는 오직 ‘양positive’의 방향만 존재한다.”(138쪽) 모으지만 밀어내지는 않죠. 그렇다면, 우주의 모든 물질 사이에서 작용하는 상호인력은 점점 더 깊은 구덩이를 만들어야 합니다. 물질들의 질량-에너지가 모여들수록 더 강하게 중력장을 형성하고, 그럴수록 더 공간을 휘어서 별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고, 결국 우주는 결국 찌부러들어 붕괴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자비가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이 대붕괴의 시나리오를 알았습니다. 상대성 이론 방정식의 해는 팽창 혹은 수축하는 역동적인 우주를 제시했죠. 하지만 우주에서는 그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죠. 아주 정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방정식에 ‘우주 상수’를 도입해 균형을 맞췄습니다. 이것은 균형을 위한 임시방편이었지만, 사실상 “시공간을 반反중력적인 기이한 힘으로 가득 채워야”(139쪽)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그 유명한 허블에 의해 1929년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왜 팽창할까요? 우주에 빼곡히 퍼진 일종의 잔열 같은 우주배경복사로부터 빅뱅 이론이 제시되었습니다. 우주의 팽창은 이 급격한 폭발 때문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멀리 던져 올린 공이 조금 더 올라가는 것처럼요. 그래서 팽창의 속도는 점점 줄어들 거라고 예상되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얼마 안 되었죠?), 우주의 팽창이 느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현재 우주는 70억 년 전보다 약 15%나 더 빨리 팽창하고 있습니다. 위로 던진 공이 계속 속력을 높이면서 올라가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죠.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공을 잡아당기는 중력을 이겨낼 수 있는 어떤 힘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의 질량에 작용하는 중력을 이기고 더 빨리 팽창시키는 그 무엇이 우주에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죠. 과학자들은 이 무엇을 ‘암흑 에너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암흑 에너지는 전체 우주 에너지 밀도의 69.1%를 차지합니다. 암흑 물질은 26.0%를 차지합니다. 그러니가 우리가 ‘우주’라고 생각했던 가시 물질은 겨우 4.9%에 불과한 것이죠.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은 다릅니다. 둘 다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단지 추론될 뿐), ‘암흑’이란 말을 붙였을 뿐입니다. 암흑 물질은 어쨌든 질량-에너지로서 중력 효과를 일으킵니다. 별과 가스 물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은하 사이의 공전속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질량이죠. 반면 암흑 물질은 반중력, 즉 척력 효과를 일으킨다고 추측됩니다. 은하단 사이는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죠. 또한 암흑 물질과 달리 우주가 팽창하더라도 엷어지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암흑 에너지가 공간 그 자체가 가진 에너지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더 자세한 건 알 도리가 없다고 합니다. “우주의 역사는 암흑 에너지의 반중력과 암흑 물질의 중력 사이의 밀고 당기기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가시 물질은 그 위에 슬쩍 무인승차를 한 셈이다.”(152쪽) 이제 ‘보이지 않는’ 이 두 스케일을 우주 역사의 주역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사실상 우리는 우주의 95% 이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죠.
EPR과 유령적 세계
그렇지만 거대한 ‘암흑’ 우주에서 시선을 돌려 가장 작은 세계를 들여다본다 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20세기의 양자 역학은 전자와 같은 입자의 ‘존재 방식’을 둘러싸고 길고도 복잡한 논쟁을 펼쳐왔습니다. 파동이면서 입자라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극단적인 예시로 말하자면 하나의 전자가 여기와 저기에 동시에 존재하는 꼴입니다. 그러면 두 개가 아니냐고요? 그렇게 해서 여기저기에 퍼져나간 파동이겠거니 생각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시치미를 뚝 떼고 한 자리에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두 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파동은 두 구멍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파동은 중첩되어 간섭무늬를 남깁니다. 입자는 시공에 골고루 퍼져있지요. 이것은 ‘단단함’이 아니며, 그렇기에 존재도 아닙니다. 그 확산된 상태이자 확률적 존재방식을 나타내는 것이 파동함수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아주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전자와 형광 막과의 상호작용은 어떤 식으로든 파동함수의 ‘붕괴’를 일으킨다. (...) 전자는 어떻게 ‘어디에나’ 있다가 순간적으로 ‘여기에’ 존재할 수 있는가?”(198쪽)
양자 역학은 ‘있다’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있다는 것은 늘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인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어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단지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닌지, '앞면이면서 뒷면'인 상태 혹은 ‘반쯤은 앞면이고 반쯤은 뒷면’인 중간적 상태로 존재하는 게 가능한지, 어느 순간 그 모호함이 분명함으로 넘어오게 되는지,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생사는 언제 결정되는지에 대한 논쟁이 불거집니다.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와 로젠은 회심의 EPR 실험을 제안합니다. 저렴한 비유를 들면, 늘 한 덮밥집에서 점심을 먹는 A와 B가 있습니다. 주인은 둘에게 참치마요와 치킨마요를 건네줍니다. 뚜껑을 닫은 채로요. A가 참치마요면 B는 항상 치킨마요죠. 만약 덮밥을 건네받고 B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건너간다면, 아직 뚜껑을 열지 않은 B의 덮밥은 무엇일까요? 만약 양자역학대로라면, 덮밥은 참치와 치킨이 동시적으로 얽힌 상태일 것입니다. B가 뚜껑을 여는 순간 파동함수가 붕괴하고 둘 중 하나로 결정되고, 동시에 A의 것도 결정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붕괴의 신호가 빛보다 빨리 이동해야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설명하지 못하면 양자 이론은 불완전하다고 말했죠. 그는 국소성을 옹호했습니다. 국소성이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두 물체는 절대 서로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물리학 원리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21세기에 시도된 실험들은 양자 영역에서 입자는 저 중간적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적어도 영자 수준에서, 실체는 국소적이지 않습니다. 입자이면서 파동, 파동함수의 붕괴, 원거리 유령 작용 등의 현상을 피할 방법이 없던 것이죠.
이제 어떤 것이 있다고 할 때 그 ‘있다’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꿔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가장 작은 수준에서 우리는 있음을 질량, 에너지, 진동수, 스핀, 위치 같은 특성들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특성은 “다만 실험의 경험적 실체에 ‘투사되는’ 것을 허락하는 관찰 또는 특정 장치와 연관되어 있을 때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207쪽)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과 그 연장인 기구들로 번역된 특성들로 어떤 것의 단면 혹은 잔상을 그려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차적인’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측정하는 특성들(외양으로서의 사물)이 반드시 입자의 존재 자체(물자체)의 특성을 반영한다거나 표현한다고 가정할 수 없다.”(207쪽)
망원경으로도 현미경으로도,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발견되는 것은 우리 지각과 지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암흑이거나 유령 같은 세계입니다. 대체 우리는 그 중간에서 뭘 안다고 생각하며 잘난 척하고 살고 있는 것인지, 문득 의문이 드네요. 천문학자들이나 물리학자들이 왜 종종 종교적 경로로 들어가게 되는지 이렇게 보면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벌써 마지막 시간만 남았네요. <물질의 탐구>를 끝까지 읽고, 몇 가지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금요일 저녁 7시, 줌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