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함께 읽은 책 <물질의 탐구>의 원제는 <MASS : THE QUEST TO UNDERSTAND MATTER FROM GREEK ATOMS TO QUANTUM FIELDS>입니다. 해석하면, ‘질량 : 그리스 원자론에서 양자장 이론까지의 여정’입니다. 네 질량입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성질이라고 여겨지는 양적 존재감인 질량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어디에 다다랐을까요? 과학만담 세미나 시즌3 마지막 시간에는 지난 50년, 그러니까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알려져 온 물질과 질량에 대한 발견을 읽고 떠들었는데요. 복잡한 수식들에는 한숨으로 대응했더라도, 수다 중에 제게 남았던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장(field)의 요동을 입고 나오는 전자
물질 자체만이 아니라 물질이 놓인 영역, 물질이 활동하는 공간적 범위를 함께 다루는 사유가 시작된 것은 1920년대 말입니다. 즉 ‘장’에 대한 연구인 것이죠. 기존의 양자역학은 물질이라 불리는 입자에 초점을 맞춰 하나의 입자의 다양한 양자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이를테면 원자 안에 있는 전자에 대한 세심한 분석들처럼요. 하지만 양자장 이론은 양자 입자들이 들어 있는 장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무수한 가상의 점 입자들이 ‘간극 없이’ 맞닿은 채, 물결이 일고 있는 3차원 영역을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되면 “장은 장의 ‘양자’보다 더 기본적인 것으로 인식되며, 양자 입자들은 양자 장의 요동, 교란, 또는 들뜬 상태에 해당” 됩니다.”(212쪽)
입자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입자는 매끈한 공백 위에 덩그러니 놓인 물체가 아닙니다. 입자와 입자 바깥은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두 차원이 아닙니다. 입자와 입자 바깥은 질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 정도상의 차이를 가질 뿐입니다. 입자란 장의 요동, 교란, 들뜸, 흥분, 돌출, 주름이며, 뭐라고 표현하건 장과 분리되지 않는 것이자 장에서 나와서 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광자는 전자기장의 양자이며 대전된 입자가 상호작용할 때 생성되거나 소멸됩니다. 하나의 전자는 전자기장 안에서 상호작용하는데, 그 상호작용은 구체적으로 장 안의 요동들인 광자들의 끊임없는 흡수와 방출입니다.
하지만 양자장과 양자의 일원론적 관계가 과학의 증명과 언어로 정립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전자가 자신의 장인 전자기장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움직이는 방식을 기술할 때 방정식의 해들이 자꾸만 무한대로 커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자기장의 양자인 광자는 여기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을까요? 램 이동, g인자, 질량 재규격화 등의 복잡한 개념 등장합니다.
재미난 사실 중 하나는 전자는 이제 단순한 전자로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신의 전자기장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기에, 우리에게 전자의 질량은 언제나 장의 에너지(가상의 광자를 흡수하고 방출하며 생기는)를 입는 것으로 관측되며, 전자의 질량은 ‘입혀진 질량’(dressed mass)을 갖게 됩니다. 전자기장의 영향을 제외한 전자의 ‘맨질량’(bared mass)는 순수한 가상의 물리량입니다. 따라서 전자의 질량은 합성물입니다. 맨질량과 입혀진 질량으로 구성된 합성물이죠. “즉 전자가 자체적으로 만드는 전자기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할 때 지니는 가상의 질량과, 전자와 전자기장 간의 무수한 상호작용을 통해 가상의 광자를 흡수하고 방출하면서 전자에 ‘옷을 입히는’ 가상의 ‘에너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질량의 합인 것이다.”(226쪽)
질량은 더 모호해졌습니다. 장의 요동이 질량에 끊임없이 옷을 입히고 있죠.
힉스, 질량을 불어넣어줘!
자석과 철가루 실험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자기장에서는 전자기력이 작동합니다. 자연의 힘은 네 가지이죠.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 그렇다면 나머지 힘들에도 그 힘들이 작동하는 장이 있어야 합니다. 물리학자들은 강력과 약력을 서술할 양자장을 탐구했습니다.
전자기장에서 전자기력을 나르는 가상의 양자(장의 요동)는 광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각 힘들의 양자장에서도 그러한 힘 나르개들이 있을 것입니다. 1950년대 물리학자들은 복잡한 대칭 정리를 이용해서 강력의 힘나르개를 설정했는데, 그것들은 광자처럼 질량이 없고 빛의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고 예측되었습니다. 하지만 강력처럼 좁은 범위(겨우 양성자와 중성자 크기 수준)에 작용하는 근거리 힘은 질량이 있어야만 했고 그런 이상 훨씬 느려야 합니다. 물리학자들은 이 가상의 힘나르개들이 질량을 얻게 되는 메커니즘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힘나르개들 뿐 아니라 쿼크를 포함한 양성자와 중성자 같은 물질 입자들 모두가 질량이 없는 2차원 형태가 되어 천연덕스럽게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게 될 것입니다(이론이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자장 안에서 입자들은 질량을 갖고 있고 이렇게 원자를 이루고 분자를 이뤘고 별 위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 분명히 질량을 부여하는 메커니즘이 자연 안에 있을 것입니다.
양자장이라는 배경에서 질량을 갖는 물질입자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질량이 없는 힘나르개가 질량을 갖게 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를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0도 이하의 물병속 물이 얼지 않다가 물병을 탁 쳤을 때 결정이 생기며 갑자기 얼 듯, 대칭적이고 균질한 배경에 특정한 구조들을 형성하는 비대칭적 계기가 필요한 것이죠. 1970년대 물리학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다른 양자장을 도입했습니다. 바로 힉스 장이죠. 전체장 안에서 질량을 지닌 입자가 형성되는 과정은 힉스 메커니즘이라고 불립니다.
“질량이 없는 입자들이 힉스장과 ‘상호작용’을 하면, 그 결과 여러 가지 효과를 일으킨다. 입자들은 세 번째 차원을 얻고 부풀어 올라 ‘두툼해진다.’ 그리고 속도가 느려진다. 그 결과 입자는 질량을 얻게 된다. (...) 이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비유가 등장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힉스장이 물엿과 비슷하게 작용하면서 입자를 잡아끌어 속도를 느리게 하고, 입자에 가속에 대한 저항 자체로 인해 관성질량을 만든다는 것이다.”(253~254쪽)
이것은 질량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 이후로, 질량은 물질의 궁극적인 구성 성분의 고유한 성질이자 선천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제1성질이라고 생각되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질량은, 질랴 없는 기본 입자의 운동이 힉스장과의 상호작용에서 ‘저항을 받는 범위’로 해석됩니다. 개념이 완전히 달라졌죠. 질량은 제2성질이 되었습니다.
질량 없는 질량 : 물질 질량의 99%는 아직 물질이 아니다
현대물리학은 쭉쭉 나아가서, 원자-양성자와 중성자-쿼크와 힘입자들까지 정리해두었습니다. 이런 기본 입자들의 목록을 ‘표준 모형’이라고 부르고 학교에서도 배웁니다. 이것만 보면 고대 원자론자들의 ‘쪼갤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자는 유효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정은 좀 다릅니다.
물질의 질량을 다룰 때, 이를테면 손 위에 있는 얼음의 질량을 다룰 때, 우리의 기존 개념은 어디까지 유효할까요? 화학시간에 배운 원소들의 질량(수소와 산소)의 합으로 계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원자 내부의 양성자와 중성자 개수를 더한 값과 거의 같습니다. 그렇다면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쿼크들로 나누어도 동일한 값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면 혼란에 빠집니다.
“이제부터 놀라운 이야기가 나온다. 같은 단위인 MeV/c2으로 비교할 때 양서자의 질량은 938.3이고 중성자는 939.6이다. 위쿼크 두 개와 아래 쿼크 하나를 합쳐봤자 질량은 9.4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양성자 질량의 1% 정도 값이다. (...) 양성자와 중성자 질량의 약 99%가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289쪽)
존재의 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쿼크는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기계론자들, 그리고 우리가 상상하는 ‘자급자족형’ 독립 입자가 아닙니다. “쿼크는 양자적 파동-입자이며, 기본 양자장의 기본적인 진동 또는 요동”입니다. 쿼크의 맨질량은 그것이 구성하는 물체의 질량의 1%도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장의 요동들로 입혀진 질량이지요. 쿼크는 절대로 보호자 없이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쿼크들 사이의 강력이 형성하는 양자장의 힘은 글루온에 의해 전달됩니다. 양성자와 중성자 질량의 대부분은 쿼크와 글루온이 상호작용하는 ‘에너지’에서 나오는 것이죠. 그러니까 물질의 경계로 굳어지지 않은 강력한 에너지가 물질 안에서 물질의 질량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아직 물질이 되지 않은, ‘질량 없는 질량’입니다(왠지 ‘기관 없는 신체’와 운이 잘 맞네요).
현대물리학이 들려주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물질 안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질량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원자 속 입자들로, 다시 원자 속 입자에서 양자장과 힘으로 파고들수록 물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 물질은 이제 형체를 잃었습니다. 질량은 제2 성질이 되었고 물질은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질량은 형체 없는 양자장들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가 ‘질량’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이 양자장들의 행동입니다. 질량은 물질에 속한 성질도 아니고 고유한 속성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단단하고 무거운 것들로 채워져 있지만, 사실상 이 세상을 장악하는 것은 양자장의 ‘에너지’다. 에너지가 질량의 발현이 아니라 질량이 에너지의 물리적 발현인 것이다. (...) 우주를 관통하는 거대하고 일관된 특징은, 단단하고 쪼갤 수 없는 원자가 아니라 양자장의 에너지다.”(298쪽)
저희는 이 책의 마지막 구절에서, 저자가 허탈하게 혹은 경외심을 갖고 반복하는 ‘양자장의 에너지’라는 것이 어떤 차원일지 이야기해보았습니다. 형체를 쫓아 가장 깊숙이 들어갔을 때 형체 없는 것으로 그저 펼쳐져만 있는 이 영역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과학자들이 종종 종교지도자와 만나거나 영적 수련으로 경로를 바꾸는 경우가 바로 이 영역의 발견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실 이 ‘양자장의 에너지’라는 차원은 현대물리학은 고도로 정교하고 엄밀한 수학과 이론과 실험 증명으로 어렵게 어렵게 도달한 영역이지만, 고대의 철학자들이나 수행자들이 이르렀던 영적 체험도 이러한 질량이나 물질 같은 규정성이 무화된 차원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그것을 언어화하고 소개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지만요. 공부를 하는 제 입장에서는 두 영역의 언어 및 방법론을 넘나들어 보는 것이 재밌을 듯합니다. 다른 공부를 통해서도 ‘양자장의 에너지’라는 차원을 여러 방식으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이렇게 3회에 걸친 과학만담 세미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물리학 책은 언제나 묵직하네요. 규문의 올해 과학공부가 지질학과 고생물학에서 시작해 물리학을 지났습니다. 물리학의 세계는 다음 기회에 또다시 돌아와 보는 것으로 하고, 이제 다음 스텝은 진화론입니다. 규문 상설 과학강좌 세 번째 시간 <진화하는 진화론>에서 만나요!
민호샘 후기를 읽고 또 읽고 세상을 봐도 나무는 나무고 산은 산이더군요. 다른 것들과 명확히 구분되는 경계와 독립적인 형체를 지닌. ㅎ . ' 에너지가 질량의 발현이 아니라 질량이 에너지의 물리적 발현인 것'이고 '우주를 관통하는 거대하고 일관된 특징'이 ' 단단하고 쪼갤 수 없는 원자가 아니라 양자장의 에너지'라고 하지만 세상은 저에겐 여전히 단단하고 무거운 것들로 채워져있습니다. 감각의 한계인지, 앎의 한계인지, 그 단단하고 무거운 경계라는 원자에 갇혀 민호샘의 글을 보고도 읽지 못하네요. 물리학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민호샘의 후기까지, 즐겁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