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전 이역만리 세미나가 이제 벌써 세 번째 시간이네요. 홉스봄의 <자본의 시대>도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굳! <자본의 시대>를 읽으면서 저는 ‘지금’ 저희의 삶을 계속해서 비춰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우리의 욕망(생존경쟁, 승자독식)은 실은 당연한게 아니라 자본주의 형성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지금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떠받들고 있는 나라들 그리고 존경하는 자수성가 백만장자들의 더럽고 잔인한 이면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던 시간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올 한해 자본의 역사+이야기를 공부하면서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새롭게 그려보고, 새롭게 질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적 귀족의 나라, 미국
19세기 미국의 자본주의는 극적인 속도로 발전을 이룩하는데요. 이 가운데서 ‘도적귀족’이란 별명이 대사업가들이 생겨납니다. 당시 미국은 어떤 배치, 어떤 조건이었기에 대사업가들이 ‘도적귀족’으로 불리게 된 걸까요? 첫 번째로 당시 미국은 ‘정부’라고 부를 만한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돈 많은 대사업가들은 어떤 국가적 제약도 받지 않았는데요. 심지어 부자들은 ‘자경단’을 만들어서 임의로 사람들을 범법자로 지목하고 살해하는 짓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로 미국의 장사꾼들은 ‘이윤의 극대화’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유럽의 기업가들의 경우에는 특정한 기술에 한정적으로 사업을 꾸려나갔다면, 미국의 기업가들은 온갖 것들에 관심을 갖고 문어발로 사업을 확장합니다. 이윤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한 것이죠. 홉스봄은 이 당시의 미국을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가 투기꾼이었고, 큰돈이 벌리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경쟁자를 쓰러뜨리는 수단으로서 사기며 뇌물이며, 그 밖에도 필요하다면 총격과 폭력 따위가 다반사였던 그러한 경제의 시대에서는 양심이니 가책이니 하는 따위는 그 누구에게도 찾아볼 수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 ‘산의 정상까지 오른 자가 최고이다. 왜냐하면 인간세계라는 정글에서 살아 남기에 최적한 자이니까’라는 교의, 즉 ‘사회적 다윈주의’가 19세기 말 미국에서 국민적 신학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도 결코 까닭 없는 일이 아니었다.‘”(<자본의 시대> / 에릭 홉스봄 / 한길사 / p303) ‘사회적 다윈주의’가 이들의 믿음 체계로 공고하게 있었기에, 이들은 경쟁 상대를 죽이고, 인디언들을 몰아내면서 부를 쌓아올립니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승자’라는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많은 죽음과 희생을 불러오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토지와 인간의 분리
이번 시간에 흥미로웠던 것은 ‘토지’와 ‘인간’이 맺는 관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제게는 토지라는 이미지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매일 걷는 길은 보도블록, 아스팔트 도로일 뿐이고 흙은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가끔 보이는 화단에서 발견합니다. ‘토지’와 ‘내’가 묶여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에는 “대다수 인류에게 삶의 운영은 토지, 그리고 그 토지 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의하여 좌우”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지역과 지역, 도시와 도시, 국가와 국가를 사람들이 활발히 오고가는 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그 땅에서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그 토지에서 형성된 공동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토지가 생산하는 곡식을 먹으며, 그 토지가 뿜어내는 기운 속에서 생로병사를 겪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토지와 인간이 묶여있을 때는 비교적 ‘불안정성’ 적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농업의 자본주의적 형태로의 이행 혹은 적어도 대규모로 상품경제화된 형태로의 이행에 따른 사회적 변동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토지에 묶여 살아온 사람과 토지 사이의 전통적인 결박(結縛) 관계를”(<자본의 시대> / 에릭 홉스봄 / 한길사 / p347) 풀어놓습니다. 공업화된 도시에서는 노동력이 무한히 필요로 했고, 시골과 도시의 격차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토지는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전환되면서 정부, 지주, 이주자, 투기꾼들이 몰려들어 토지를 값싸게 수탈해갑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토지와 인간의 관계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지금 우리에게 토지는 우리 삶과 전혀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있었습니다. <자본의 시대>를 읽고 나니, 역으로 질문이 솟아오릅니다. 토지가 뭐지? 토지와 분리되어서 살아간다는 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지? 항상 지면을 밟고 있으면서, 땅과의 연결성을 잃어버린 이유는 뭘까? ‘자본의 역사’를 공부해가며 이러한 질문을 하나하나 풀어보고 싶네요.
@ 2주차(3월 8일) 발제/간식은 장청샘, 혜원샘입니다.
@ <자본의 시대>는 13장, 14장, 15장, 16장 한 마디로 끝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땅으로부터 뽑혀나온 노동력, 세계시장의 불안정성과 부의 축적에 열광하는 가치관의 변화. '이윤추구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본주의적 마인드'라는 게 19세기 말에 그토록 강력하게 형성되었던 것일까요. 많은 사건, 상황, 조건들이 서로 맞물려가는 역사적 형성과정이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1848년 혁명, 1871년 파리코뮌 이후의 세계가 혁명이념 자체를 배반하는 부르조아와 전통권력층의 이해관계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어가는 모습이 책을 읽기에도 허탈한 느낌도 들고요. 그래서 당시 지식인들의 기대와 희망, 패배의식과 혐오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세기말 예술작품들이 폭포수처럼 넘쳐흐른 하나의 조건이 되었던 것 같아요. 다음시간에 재미있게 이야기 나눠봐요~~^^